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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소비사회에서 명품 찾기?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rn(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9-08-06 수정일 2019-08-06 발행일 2019-08-11 제 315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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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본주의 시장은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백화점 진열대뿐 아니라 TV와 인터넷, 홈쇼핑 등에서 무수한 상품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소비가 미덕인 양 비춰지는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소비의 근원적 가치와 실천적 의미에 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오래전부터 ‘명품’ 소비가 있어 왔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은 접할 수 없는 수입고가품 등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고자 하는 과시에 해당하지요. 베블렌(Veblen)이란 학자는 이런 ‘과시적 소비’는 자신의 재력으로 여가시간을 즐기는 데 탐닉하는 한량(leisure class)들의 사치문화라고 꼬집어 지적했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부인들의 사교모임에는 명품 가방을 들지 않고서는 참석이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명품 가방을 고가의 대여비를 받고 하루만 빌려주는 업체도 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온몸을 명품 브랜드로 치장하고 남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남들의 시선에 굶주려 있는 영혼은 얼마나 초라할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한편 우리는 값비싼 명품이 아니더라도 ‘유행’(fashion)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지요. 한겨울에 한 학급 전체가 교복도 아닌 특정 브랜드 검은 패딩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문화의 획일성에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짐멜(Simmel)은 유행을 따르는 심리는 집단 전체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얻게 되는 안도감 때문에 생긴다고 말합니다. 나 혼자만 다른 옷을 입을 때 외부로부터 오는 ‘불편한 시선’을 감당할 내면의 힘과 자기권위가 없기 때문에 유행이라는 집단 동조의식에 맞춰 사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셈이지요.

부르디외(Bourdieu)에 따르면 ‘명품’과 ‘유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심리 밑바닥에는 ‘구별짓기’(distinction)의 사회계급적 전략이 깔려 있습니다. 상류층은 해외에서 유행하는 고급브랜드로 자기의 기호와 위신을 도드라지게 하고 싶어 하고, 중류층은 은연 중에 그런 명품 패션 ‘따라잡기’에 빠져들곤 합니다.

기실 우리는 오로지 시장에서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상품들만을 ‘소비’로 인식하고 돈으로 계산하고자 하는 ‘시장 패러다임’의 압박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비는 원래 인간 삶의 양식(modus vivendi)입니다! 소비는 단지 시장에서의 상품구매라는 좁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 더 큰 사회윤리적 차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일제나 악덕기업에 대한 불매 운동은 갑질이나 부도덕성을 고발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시장에 반영하는 소비자의 수준 높은 주권행사지요.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거부 혹은 친환경적인 제품이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건실한 기업의 생산품을 구입하는 ‘착한 소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사회생활을 하며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한 ‘노동’ 그리고 타인과 더 깊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고자 ‘시간’을 내어주는 마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봉사’의 땀방울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때로는 관대하게 낭비해야 하는 삶의 양식입니다. 이렇듯 일상생활에서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우리의 무수한 노력들을 저는 ‘실존적 소비’라고 부릅니다. 나와 가족, 이웃과 공동체,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 소비는 모두 공존을 위한 삶, ‘실존 패러다임’입니다.

우리 인간과 세상 피조물을 만들어 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 끊임없이 수고하시며 애쓰시고 계십니다.(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236) 하느님은 언제나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소유에 대한 지나친 탐욕 때문에 그분 사랑의 선물을 알아채지 못할 적이 너무도 많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사랑을 낭비 혹은 허비로 보일 만큼 아낌없이 내어주며 소비하십니다.

우리들 하나하나를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빚어내시고 보시니 좋다고 말씀해 주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신앙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명품’입니다. 성공과 재력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외관이 초라하고 몸이 온전히 성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아로새기고 있는 우리 자신은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명품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시간을 돈으로 채우지 못한다 해도 이웃과 공동체에 온전히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과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삶에서 봉헌되는 ‘명품 소비’가 아닐까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세일 신부rn(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