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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내 안의 성지(聖地) / 이광용

이광용(암브로시오)rn시인
입력일 2019-07-23 수정일 2019-07-23 발행일 2019-07-28 제 3155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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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지를 순례하다 보면 참 잘 정돈된 자연을 만나게 됩니다. 강과 산과 들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이 새삼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런 마음으로 순례하다 보면 그 안에서 먹고 먹히며 살아가는 것들이 결국에는 서로의 생명을 살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라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밥이 되고 희망이 되는 산야의 곡식과 열매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살아가고 죽는 일이 다 덕을 베푸는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삶을 왜곡합니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일만 생각합니다. 먹는 일은 그저 지배하고 독점하고 죽이는 일이 되고, 먹히는 일은 고통과 박해를 받는 일에 불과해집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일이 살리고 희망을 주는 일이 아니라 종종 싸워야만 하는 일이 됩니다. 그 세상에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도 박해받고 죽어야 하는 두려움의 길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 선조들은 기꺼이 먹히는 길, 먹혀 살리는 길을 택함으로써 죽음의 길을 생명의 길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죽음의 황야에 불과했을 장소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성지로 정돈돼 그곳을 순례하는 우리를 살려냅니다. 죽음으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이 있어 하느님의 섭리를 새삼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하지만 그 확고해진 믿음을 시험하듯 뜨거운 햇살이 내리쬡니다. 금세 옷이 땀에 젖고 햇살이 귀찮아집니다. 편안한 휴일에 괜히 이 길을 떠났나 싶어집니다. 순교자들이 겪었던 고난과 박해의 길에서 편하고 시원한 그늘을 먼저 찾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내 삶이 종종 이렇습니다. 고통이나 박해랄 것도 없는 사소한 유혹이나 욕심에 쉽게 무너집니다. 작은 불편이나 화도 참기 어려워 종종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순교자가 아니라 배교자가 돼버립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서 좋은 것은 내가 먼저 챙기고 불편한 것은 예수님이 감당해 달라고 떼를 쓸 때가 많습니다. 순교자가 아니라 박해자가 돼버립니다. 박해와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사랑과 생명의 시간으로 정돈된 순례길을 가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길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보니 내 몸과 마음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십자가입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이 수없이 배신과 수난을 당하며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정작 필요할 때 모른 척합니다. 작은 불편이 싫어서, 사소한 욕심이나 유혹을 놓치기 싫어서, 보잘것없는 자존심이나 체면이 구겨지는 게 싫어서 작은 희생과 사랑과 인내와 겸손을 부탁하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맙니다. 내게 낯설다는 이유로,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종종 예수님이 사랑하는 이들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그런 나 때문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거자들이 박해받으며 순교합니다. 내 안에서, 내가 가는 길에서, 나 때문에 돌아가시는 하느님, 내가 죽인 하느님이 많아집니다.

그러고 보면 내 몸과 마음은 온통 예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박해받고 순교하는 장소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나는 그저 어지럽고 적막한 황야에 불과합니다. 이제 박해와 고통, 배신과 갈등의 시간을 아름답게 정돈해야겠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예수님이 부활해 나를 살리는 성지, 나를 만나는 이들도 같이 살리는 성지로 가꾸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의 성지를 자주 순례해야겠습니다. 거기서 믿음의 힘, 삶의 활력을 얻어야겠습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광용(암브로시오)rn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