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신앙의 유산

허돈(베드로·서울 녹번동본당)
입력일 2019-06-25 수정일 2019-06-25 발행일 2019-06-30 제 315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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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를 생각한다. 밀양 박씨 데레사, 부기가 덜 가신 할머니 얼굴.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할머니 모습의 전부다.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는 우리 외할머니. 다니는 성당 맞은편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던 할머니의 집은 성당의 종탑이 눈앞에 빤히 보였고, 삼종 때마다 울려 퍼지던 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둘째의 서러움. 나는 둘째였다. 무엇이든지 나는 둘째였다. 태어나기도 둘째요, 옷을 입어도 새 옷의 두 번째였다. 당연히 사랑도 둘째, 2년 터울의 형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 다섯 명. 그 시대가 으레히 그래왔듯이 형은 부모님은 물론이고 특히 외할머니에게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할머니의 그 억척스러운 첫 손자에 대한 사랑은 당신의 신앙만큼이나 중요했던 모양이다. 가끔 넋두리처럼 “이놈을 잘 키워야 내 딸이 편해” 하시던 그 말씀은 결국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던 내 어머니를 향한 사랑의 행위였지 싶다.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도 성당을 향한 삼종기도를 드리던 그 모습에서 끈질긴 신앙의 뿌리는 결국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내가 이해하기에는 참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병자성사를 받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에서, 채 부기가 빠지지 않았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난 그때는 몰랐었지만 죽음에 임하는 신앙인의 참모습을 언뜻 본 것 같다. 숱한 시간이 지나간 지금 나를 당신과 첫 손자의 영역에서 밀어내기만 하셨고, 아예 범접을 허용치 않았던 할머니의 매정함에도, 내가 지금껏 갖고 있는 신앙의 뿌리는 당신으로부터 전해진 우리 집안의 신앙 근간이 되어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그 옛날 다윗 왕이 밧 세바를 취하려고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하는 비극 속에서도 솔로몬의 등장으로 하느님의 계보를 이어갔듯이, 할머니의 그 신앙의 유산은 지금 나의 손자 다미아노에게 전해진다.

다미아노가 새벽미사의 복사로서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에서 할머니가 겹쳐짐을 느꼈다. 그 시절 할머니의 모든 것을 퍼즐처럼 하나하나 조합하여 지금의 나를 다시 한 번 조명해본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계획은 인간이, 실행은 하느님께서….

허돈(베드로·서울 녹번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