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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하느님의 거짓말과 제2의 기회’ / 유안진

유안진(클라라)시인
입력일 2019-06-25 수정일 2019-06-26 발행일 2019-06-30 제 315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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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창세기는 시를 쓰는 내게 참으로 기막힌 놀라운 발상을 자극하곤 한다. 써진 글 내용 이상의 행간 읽기에 놀랍고 멋진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여러 편의 시를 쓸 수 있었지만, 아직도 창세기는 읽을 때마다 다시 묵상하게 하는 무한한 영향력을 지닌다. 창세기에서 얻는 인문학적 예술의 깊이와 너비, 높이는 하느님과 그분이 손수 지어 키우시는 우리와의 관계, 즉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인 천륜에 대해 무궁한 사유를 이끌어 주신다.

무한 매력을 지닌 창세기 내용 중 하나가 ‘선악과 사건’이다. 하느님은 어째서 아담의 선악과 사건에서 거짓말을 하셨을까? 동산의 여러 과실을 다 따먹어도 좋은데,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창세 3,3)라고 ‘협박’하셨으면서도, 아담과 하와가 명령을 어겼을 때 죽게 하시진 않으셨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을까?

늘 의문을 지닌 채 음미하다가 ‘절대 부모님’, ‘절대 사랑’, ‘절대 용서’의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됐다. 마침내 우리 삶에서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보고 들으면서 ‘아하 이러해서 그러셨구나’ 하는 결론에도 이른다. 부모가 돼 보니 하느님의 심정이 조금 더 잘 이해된다.

부모도 말썽을 부리는 자식에게 경고나 협박을 한다.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거나 부모 자녀 관계를 절단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부모도 호적에서 파내지 못한다. 또다시 강력하게 협박하고 맹세를 받아 내지만, 또 부모는 자식에게 기회를 주곤 한다. 이게 부모 마음, 사랑이고 희망이고 애원이고 간청이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협박하신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아담과 하와를 손수 지으신 부모로서 하느님은 얼마나 아프고 슬프고 한심 절망적이었을까. 그 심정에 이해를 넘어 가슴에 쓰라린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그 고통에도 차마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죽일 순 없으셨다. 어떤 부모가 낳아 키운 자식을 죽일 수 있겠는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느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것은 아닐까. 그러니 차라리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낫지, 우선 자식들 살려놓고 봐야지, 고생하면 철들겠지.’ 하시면서 당신 입으로 약속하신 말씀을 스스로 져버린 거짓말쟁이가 되신 것 아닐까. 아담과 하와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시려, 에덴동산 밖으로 둘을 내쫓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오셔서, 당신 자녀들이 받을 죄악의 대가를 친히 몸소 받아 내셨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고 본다.

아담과 하와에게 뿐만이 아니다. 하느님은 질투로 동생을 죽인 살인자 카인에게도 제2의 기회를 주셨다. 이마에 낙인을 찍어, 만나는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망신만 당하게 하셨다.

빚진 자는 탕감받고, 죄 많은 곳에는 은혜도 많다는 말씀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됐다. 많이 탕감받기 위해 많이 빚지고, 많은 은총을 얻기 위해 많은 죄를 지어야 할까? 물론 아니다. 단지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애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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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클라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