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알아보는 두 사도의 생애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19-06-18 수정일 2019-06-19 발행일 2019-06-23 제 315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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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인간이었기에 더 큰 울림 주는 신앙의 모범
겁 많고 우유부단한 베드로와 교회 박해하던 악랄한 바오로
예수 만난 뒤부터 변화된 삶 살며 ‘교회 반석’ ‘이방인의 사도’ 거듭나

6월 29일은 전례력으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다. 두 사도는 교회의 본질과 특징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존재다. 베드로 사도는 일치의 상징이다. 이를 위해 그에게 수위권이 부여되면서 교회의 반석으로 자리매김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확장시켜 진보와 개방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뛰어난 업적을 펼친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 흙수저 시몬(베드로), 금수저 사울(바오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 두 사도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많은 차이가 있다.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접촉이 잦았던 갈릴래아 벳사이다 지방에서 어부 요한의 아들로 태어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로 일했다. 결혼한 후에는 카파르나움으로 이사해 장모를 모시고 살았고,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요한 세례자를 따르는 제자였다. 군중들을 가르치던 예수는 어부 시몬의 배에 올라타 ‘사람 낚는 어부’로 그를 부른다. 시몬을 유심히 본 예수는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훗날 실제로 교회의 반석이 되지만 예수의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가난한 어부였다.

반면 바오로는 열심한 정통 유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였고, 그리스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운 대도시 킬리기아의 수도 ‘타르수스’라는 지역에서 자랐다. 또 로마 시민권을 태생부터 갖고 있었다. 그가 지녔던 유다식 이름 사울과 로마-그리스식 이름 바오로는 이렇게 화려한 배경에 기인한다. 아울러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이런 문화배경은 큰 도움이 됐다.

■ 겁쟁이 베드로, 박해자 바오로

확연히 차이나는 두 사도의 출생과 성장배경은 각기 다른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자주 나타난다. 예수와의 첫 만남부터 그러하다. 배에 올라탄 예수의 지시로 많은 물고기를 잡자 베드로는 기뻐하기보다 예수 앞에 무릎 꿇고 말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이런 그에게 예수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이르며 첫 제자로 부른다.

또 스승의 부름에 물 위로 발을 옮겼지만 두려움에 싸인 베드로는 허우적대고, 이 모습을 보며 예수는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후 절정의 순간인 예수가 수난당할 때도 두려운 마음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자신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겁 많았던 베드로와 달리 어려서부터 유다인으로서 철저한 종교교육을 받았던 바오로는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다고 고백한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6) 때문에 바오로는 율법을 비판한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다. 나아가 율법 신봉자였던 바오로는 율법과 성전에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선다.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사도 6,1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사도 8,1) 이와 같이 바오로는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거슬러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카를로 크리벨리의 ‘베드로와 바오로’. 오른쪽이 사도 베드로.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 베드로의 눈물, 바오로의 회심

이렇듯 겁 많던 베드로와 악랄했던 바오로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도가 됐을까.

우유부단하고 소신 없는 모습으로 비춰진 베드로는 예수의 인내와 가르침 속에서 성장한다. 아울러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응답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15)는 예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한다. 믿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건넨다. 이후 베드로는 수난당하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 모습을 자책하며 통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베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양들을 맡긴다.

반면 바오로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단번에 회심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급변했고 그의 신념과 신학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누구보다 열심한 바리사이파 유다인이었던 바오로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의 자랑거리들을 쓰레기로 여겼다.(필리 3,8)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기 위해서다.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체험은 마침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

예수 승천 후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지도적인 인물로 활동한다. 주로 예루살렘 지역에서 신자들을 돌보며 설교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증언은 많은 유다인들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꽃을 일으켰다.

예루살렘에서 주로 활동했던 베드로와 달리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며 선교를 다녔다. 세 번에 걸친 바오로의 전도여행으로 수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됐다. 전도여행 중 바오로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서간문 형식으로 저술한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교리가 형성되는데 있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두 사도의 관계는 각별했다.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는 서로에게 큰 영향을 줬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들의 회의(사도 15장)를 통해 두 사도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다. 바오로가 제1차 전도여행을 끝내자 수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과연 이들에게 유다인들의 율법, 그 중에서 할례에 관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야 할 것인가가 쟁점으로 대두됐다. 열띤 회의 끝에 사도들은 유다교 율법에 따라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 개종한 이방인들을 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울러 이방인 전교를 바오로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에는 베드로의 의견이 크게 영향을 줬다.

■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한 두 사도는 네로 황제(54~68)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시기에 순교했다.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바오로는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이 같은 해, 같은 날 순교했는지에 대한 고증은 불가능하지만, 이미 3세기 중반부터 6월 29일에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기 시작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모습을 지녔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예수의 보호 아래 온 생애를 교회에 헌신하며 순교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두 사도는 신앙의 모범이자 선교의 표상으로서 신앙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