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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특집] 전사자의 아내, 김차희 할머니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9-06-18 수정일 2019-06-18 발행일 2019-06-23 제 315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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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기다려온 당신…  죽어서라도 곁에 묻히고 싶어요”
학도병 남편 전사한 후 신앙의 힘으로 살아와
마지막 소원은 유해 찾아 국립묘지 묻히는 것

수원 보훈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차희 할머니가 6월 13일, 6·25에 참전해 전사한 남편에게 쓴 편지글을 바라보고 있다.

경기도 수원 보훈원에 들어서면 태극기 밑으로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문구가 적힌 출입문이 보인다. 6·25 한국전쟁 중 전사한 남편 고(故) 성복환씨를 70년 가까이 가슴에 묻고 사는 김차희(바르바라·91) 할머니가 외롭지만 기도 속에서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

이 작은 공간에는 한국 현대사의 쓰라린 아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전쟁 미망인의 한 맺힌 인생, 그러나 신앙의 힘으로 이 모든 상처를 극복해 낸 한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이 서로 얽히고설킨 채 공존하고 있다.

■ 한 장의 편지글에 눈물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 두 칸짜리 생활공간이 나오고 큰 방 벽에 ‘60년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이란 제목의 붓글씨 글이 액자에 걸려 있다. 글쓴이는 ‘김차희(83세)’라고 기록돼 있다. 김 할머니가 보훈원에 들어오기 전인 2010년경 남편을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김 할머니는 이 글을 볼 때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다. 마지막 문장 옆에 끼워진 한 장의 사진이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한 남편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남편 사진 바로 밑으로는 젊은 시절 김 할머니의 사진이 다정히 놓여 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시리기도 하다.

올해 6월 6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모식에서는 김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이 소개되면서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과 김정숙(골룸바) 영부인 등 참석자들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탤런트 김혜수씨가 ‘60년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을 요약한 편지글을 김 할머니를 대신해 낭독하며 눈물샘을 자극했다. A4용지 한 장이 조금 안 되는 이 편지글은 스무 살에 결혼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김 할머니의 인생사를 애절하게 묘사했다.

1928년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948년 3월 16일(음력)에 한 살 연하인 성복환씨와 혼례를 치렀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이 집안끼리의 중매로 만나 경북 상주 시댁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이 부산 동아대에 재학하고 있어 방학 때만 잠깐씩 집에 왔다 가곤 하다 보니 얼굴 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 학도병으로 끌려간 남편의 쪽지글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1950년 6월 25일 민족사 최대 비극인 6·25가 터지고 한 달여가 지나 남편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학도병들은 2주 정도 짧은 훈련을 받고 전투에 투입됐다. 남편의 입대 날짜는 정확히 1950년 8월 10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남편을 다시 못 만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남편은 전장 투입을 앞두고 같은 해 9월 어느날 경북 상주 상산초등학교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집안에 쪽지글을 써 보냈다. 김 할머니는 “아마도 남편이 집안 어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쪽지 내용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어렴풋이 회고했다.

마지막 쪽지를 남기고 경북 백천지구 전투에 나선 남편은 그해 10월 13일 전사했다. 전사통지서에는 ‘성복환 일병’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사통지서를 집안 어른들이 받고는 저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척한테 전해 듣고서야 남편이 전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남편을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도 없이, 자식도 없이 시댁 식구들 틈바구니에서 저의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전사한 남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전사 일자와 장소만 통지됐을 뿐이다. 6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 유해는 찾을 기약이 없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 김 할머니는 50년 넘게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활동했다.

■ 신앙이 삶의 모든 것이 되고

시댁에서 13년간 더부살이를 하던 김 할머니는 1960년 1월쯤 독립해 나왔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다. 다행히 시댁 유산을 일부 물려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김 할머니에게 신앙이 찾아 왔다. 이웃에 사는 상주 서문동본당 신자들이 “성당에 다니자”고 권유한 것이다. “특히 한 중학생이 저를 자주 찾아와 전교했습니다. 몇 번 성당에 가겠다고 말하고 선뜻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가 1961년 9월 3일 주일에 처음으로 성당에 나가 예비신자 교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4개월 교리 후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는데 저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4개월 더 교리를 배우고 1962년 부활 성야인 4월 21일 영세했습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김 할머니의 모든 것이 됐다. 외국인 성직자와 북한에서 월남한 수도자에게 받은 감화가 너무나 컸다. “제가 처음 성당에 다닐 때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던 시절인데 독일인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본래 분단 전 북한에서 사목하시다가 공산정권의 탄압을 받아 본국으로 추방된 뒤 다시 한국에 오셨을 정도로 한국을 아끼신 분이셨어요. 한국인 수도자 역시 북한에서 박해를 피해 내려온 분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을 보며 ‘내가 겪은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서문동본당 신자가 급증하면서 남성동본당 등이 분가되자 김 할머니도 레지오 마리애 단장과 성모회 회장 등의 직책을 맡아 성당에서 살다시피 바쁘게 봉사활동에 임했다. 50년 넘게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며 장기 근속상 표창과 기념 묵주를 받은 것을 보람과 자부심으로 여긴다. 김 할머니가 대모를 선 대녀만도 100명이 넘는다.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대녀도 많지만 매일 같이 대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

김차희 할머니는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남편의 유해를 찾아 남편과 함께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이 소원입니다. 현충일 추념식에서 제 소원을 들은 문재인 대통령께서 ‘정부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 유해를 발굴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셔서 참 고마웠습니다.”

◆ 국군 전사자 16만6000여명 중 13만여명 미수습

6·25 한국전쟁에 참전해 숨진 국군 장병 수는 약 16만6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통계 수치는 발표 기관과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전체 전사자 가운데 약 2만9000여 명이 전장에서 수습돼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미수습’ 전사자는 13만 명이 넘는다.

정부는 미수습 전사자 유해 발굴을 목적으로 2000년 4월 육군본부의 한시적 사업 형태로 미수습 전사자 유해발굴을 시작했고 2007년 1월 사업 주체를 육군본부에서 국방부로 바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했다. 2000년부터 올해 6월 11일까지 발굴, 식별한 미수습 전사자 유해는 모두 1만493위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유전자 확인을 거쳐 유가족에게 유해가 인계된 미수습 전사자는 모두 132위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