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6·25 전쟁 속 기억해야 할 세 명의 사제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19-06-18 수정일 2019-06-19 발행일 2019-06-23 제 315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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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무릅쓰고 양들 위해 헌신했던 참 목자

5월 24일 북수동성당에서 진행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현장조사 중 조사단이 데지레 폴리 신부 초상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69년 전 6월 25일 한반도 전역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남측에서만 총 16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동존상잔의 비극은 3년 넘게 이어졌다. 참혹한 전쟁의 역사 속에 기억해야 할 세 명의 신부가 있다. 교구 내 본당에서 사목한 데지레 폴리, 앙투안 공베르,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다. 프랑스에서 온 푸른 눈의 신부들은 전쟁의 공포를 마주한 신자들 곁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신부를 따르던 신자들은 “비록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죽음에 저희가 울지언정 그분은 영광스럽게 순교하셨기에 저희는 그저 그분의 영광을 전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을 향한 총구의 공포를 이겨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의연하게 자신의 생을 봉헌한 세 명의 신부를 6·25 전쟁 69주년을 앞두고 기억하고자 한다.

데지레 폴리 신부

■ ‘한국이 제2의 고향’ 데지레 폴리(한국이름 심응영) 신부

1884년 프랑스 아르데슈주에서 태어난 데지레 폴리 신부는 1907년 5월 28일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서 사제품을 받고 세 달 뒤 한국에 입국했다. 인천 제물포본당(현 답동본당)과 충청도 수곡본당, 서산본당(현 서산동문동본당), 강원도 원주본당(현 원동본당), 대전본당(현 대전목동본당) 주임을 거쳐 1931년 5월 10일 경기도 수원본당(현 수원북수동본당)에서 사목했다.

그는 수원본당에서 사목할 당시 부인 명도회를 조직해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성당 건축에도 힘썼던 그는 수원 최초의 고딕 성당인 수원성당을 1932년 11월에 완공했다.

이후 천안으로 사목지를 옮긴 폴리 신부는 1950년 8월 23일 천안본당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돼 대전으로 이송, 프란치스코수도원에서 9월 23일과 26일 사이에 피살됐다고 전해진다. “이 나라는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내 뼈를 이 땅에 묻을 각오가 됐다”는 신념으로 사목활동을 펼쳤던 폴리 신부는 한국 전쟁이 일어난 뒤 주변에서 피난을 권하자 “사제는 본당에 상주하며 신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마땅하다”며 성당을 지켰다. 폴리 신부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자 수원 신자들은 1995년 9월 17일 북수동성당 구내에 폴리 신부의 유품 전시장을 만들고 폴리 신부 기념비를 건립했다. 2007년 ‘심뽈리 화랑’으로 재단장한 이곳에는 폴리 신부의 초상화를 비롯해 십자가와 성작, 성합이 전시돼 있다.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

■ ‘죽는 순간까지 신자들 생각’ 조제프 몰리마르(한국이름 모요셉) 신부

프랑스 출신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는 1926년 5월 황해도 매화동 본당에서 한국 신자들과 만났다. 같은 해 12월 경기도 병점공소(현 화성시 병점동)에서 사목한 뒤 경기도 평택본당과 서정리본당(현 서정동본당) 주임을 역임했다. 특히 평택본당에서는 지역 복음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유산으로 받은 고향의 포도밭을 팔아 서정리에 새 성당을 짓기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몰리마르 신부는 외진 공소로 피신해 있다가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당분간 성당에 자주 나오지 말라고 전하며 혼자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그해 8월 20일 공산군에게 체포됐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죽음의 순간까지 한국의 신자들을 생각했던 몰리마르 신부의 뜻을 엿볼 수 있다. 신부는 자신이 죽으면 소유하고 있던 모든 것을 부여나 규암에다 성당을 짓는데 사용해서 금사리본당에서 분리된 신설 본당을 세우라는 당부를 유서로 남겼다. 현재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는 평택성당에 안장돼 있으며 추모비와 기념정원을 조성해 신자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앙투안 공베르 신부

■ ‘지역사회 위해 헌신’ 앙투안 공베르(한국이름 공안국) 신부

두 살 터울 동생과 함께 사제품을 받은 공베르 신부는 1900년 10월 9일 동생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안성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안성, 평택, 천안 등지의 16개 공소를 돌봤다.

의병 운동과 3·1운동 때 일본인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성당에 수용해 보호하기도 했다. 1909년 설립한 안법학교도 그의 큰 업적으로 꼽힌다. 학교 운영을 위해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고 알려진 공베르 신부는 떨어진 옷을 기워 입는 등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한국의 신자들을 위해 베풀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서울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의 지도신부였던 공베르 신부는 7월 11일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체포돼 납북됐다. 그해 11월 추위와 눈 속에서 180㎞가 넘는 길을 걸었던 신부는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급속히 몸이 쇠약해져 중강진에서 선종했다고 전해진다. 안법학교는 교정에 공베르 신부의 흉상을 세워 그의 이웃사랑과 평화의 실천 정신을 기리고 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