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37) 소셜미디어 시대, 가톨릭교회에 필요한 것은 ‘우정’ / 존 알렌 주니어

존 알렌 주니어(크럭스 편집장)rn※존 알렌 주니어는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
입력일 2019-06-18 수정일 2019-06-19 발행일 2019-06-23 제 3150호 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가끔 로마의 이런저런 행사에서 발언할 기회가 있다. 최근 ‘소셜미디어: 대결에서 공동체로’라는 주제로 주 교황청 영국대사관과 헝가리대사관, 교황청 홍보를 위한 부서(이하 홍보부)가 공동주관한 워크숍에서 했던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나 말고도 이탈리아 국영 방송 라이(RAI)의 교황청 담당 기자인 바니아 데 루카가 토론에 참여했고, 최근 교황청 홍보부 편집주간으로 임명된 베테랑 언론인 안드레아 토르니엘리가 사회를 보았다. 나는 미국 내 양극화 현상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두드러진 사회학적 경향은 ‘자발적 분리’였다고 지적했다. 온갖 자료가 입증하듯, 미국인들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일하며, 종교생활과 여가시간도 함께 보내는 경향이 있다.

현실과 가상 세계 모두에서 미국은 서로 벽을 치고 단절된 공동체들의 국가가 된 것이다.

사회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양성 속에서는 타협점을 찾으려하기 때문에 이질적 환경은 의견들을 중간쯤에서 조정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질적 환경은 견해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단절된 공동체를 선택한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그 결과는 단순히 양극화에 그치지 않는다. 터놓고 말해서, 모든 사람이 ‘좌’와 ‘우’라는 두 집단으로만 크게 나뉜다면 상황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부족화’에 더 가깝다. 교회 안에는 개혁파 가톨릭 신자들, 신보수주의 가톨릭 신자들, 생명 운동파 가톨릭 신자들, 전통주의 전례 가톨릭 신자들, 사회 정의파 가톨릭 신자들 등등이 있으며, 대체로 이들은 굳이 상대를 알거나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토론에서 지적했듯이, 미국 내 가톨릭계의 오랜 궤적은 최근 두 가지 요인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첫째,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의견을 양극화로 몰고 가는 거물이 두 사람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배경과 관점을 상징하지만, 모든 이의 관심을 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두 번째 더 큰 요인은 소셜미디어의 부상이다.

긍정적 반증들이 많이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나는 소셜미디어를 암적 존재로 여긴다. 나는 소셜미디어가 공적 논의에 독이 되며,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기도 전에 사사건건 모든 일에 관해 이른바 ‘인스타그램 여론’을 형성하도록 유혹하여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고 본다. 소셜미디어는 생각하는 머리보다는 비판하는 입을, 깊이보다는 속도를 높이 평가하며, 통찰력과는 거의 무관한 영향력이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이) 힘을 발휘하는, 기이한 평행 세계이다.

가톨릭 소셜미디어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경향을 쉽게 눈치 챌 것이다. 교회는 문화의 복음화를 이루는 주체가 되고자 하지만 되레 문화에 의해 복음화되는 경우도 많으며, 소셜미디어가 그 대표적인 예다.

만약 소셜미디어 이전 시대로 돌려보내줄 리셋 버튼이 있다면 나는 그 버튼을 누르고 싶어 안달이 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부족들로 갈라져 날선 비판들을 주고받는 시대에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번에 해결할 마법지팡이는 없다. 그러나 오랜 경험상, 부족 간 분열을 극복하거나 적어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바로 우정이다.

오랫동안 특정 개인이나 집단, 흐름이나 당파를 적으로 여기며 거의 악마 보듯 했던 이들이 나중에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상대를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경우들을 봐왔다. 그들은 여전히 ‘상대’와 합의를 이루지는 못했겠지만 더 이상 상대를 악마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설교나 권고, 교황 메시지나 학습 프로그램들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뜻밖의 상황들이 겹쳐져 운명이 그들을 다른 부족 사람들과 한데 엮어주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유기적으로 우정이 피어났다.

뜨거운 논쟁들에서 우정이 시작된 경우는 없었다. (실제로 내가 들었던 사례들을 꼽아보면) 해외여행에서 우연히 같은 그룹이 되거나, 경기장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거나, 못된 주인 밑에서 한동안 함께 임시직으로 일하는 등, 계기는 제각각 달랐지만 무언가가 이들을 한데 모아주었고 서로를 향한 공감대를 열어주었다.

그 계기로 그들은 적대심 없이 서로의 차이를 들여다보고 상대의 좋은 점과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을 기꺼이 바라봐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론은, 특히 지금과 같은 소셜미디어 시대에 교회는 부족 간 경계를 허무는 이런 유대가 형성될 수 있는 우정의 자리를 만들어가기 위해 현재의 문화에 맞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내 대화에서는 그 누구도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 적으로 취급받지 않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우리 가톨릭 언론인이 하려는 일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이 놀라운 미디어 신세계에서 중요한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존 알렌 주니어(크럭스 편집장)rn※존 알렌 주니어는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