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 문학산책] 5 프랑스 프랑스와 모리악 「테레즈 데케루」

이규식ㆍ안젤로ㆍ대전 태평동본당ㆍ한남대 불문과 부교수
입력일 2019-06-12 수정일 2019-06-12 발행일 1991-10-20 제 177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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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인간비참” 파헤친 심리소설

악의 시련 통해 신에게 나아감 강조
숨막히는 환경속에서의 인간문제 적나라하게 묘사
구원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암시
1952년 노벨문학상 수상…보수 가톨릭파로 공산ㆍ실존주의 반대

21세기를 바라보는 이즈음의 프랑스문학에서는 어떤 주도적인 문예사조나 소위 에콜을 이끄는 작가가 눈에 띄지 않는 다양함속에서 갖가지 시도와 문학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나의 굳건한 문학적 전통이 건재하고 있는데 그것이 가톨릭 문학이다. 전체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신자의 프랑스에서도 20세기들어 무신론적 문학경향에 현혹되어「신(神)없는 문학」으로 간주하려는 유혹이 간단없이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말로, 사르트르, 카뮈 등에게서 드러나는 이 경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형이 상학적 성격과 윤리적 밀도를 자체내에 가지고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문학도 기존 율법을 거부하고 하나의 영적(靈的)모험으로서의 신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문학의 행동철학과 일견 유사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신(神)의 존재와 부재(不在)는 본질적인 인간사고와 존재양식의 중요성에 관련된 문제로 치환되어 프랑스의 지적(知的), 사상적 전통을 이루며 비옥한 문학의 토양을 일구어 놓게 된 것이다.

프랑스 근ㆍ현대문학은 바로이 두 가지의 경향이 맞물려있는 모달리스트 전통에 충실하면서 인간의 내면적ㆍ심리적 드라마에 대한 주의깊은 관찰과 탐색을 주된 목표로 삼아왔다. 20세기에 이르러 합리주의의 교설이 새롭게 검토된 이래 종교는 파스칼이 말한 바와 같이 이성, 도덕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기본적 세계 즉「신성」의 세계속에서 새롭게 재생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19세기말 과학만능, 실증사상 등 유물론의 전성기가 끝나고 이른바「황금시대」이후 1차세계대전의 참화가 기존사상, 질서,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 회의와 의문제기를 가져옴과 때를 같이하여 우리는 프랑스와 모리악(1885~1970)의 문학이 보여주는 짙은 신앙적 메시지의 출발을 볼 수 있다.

상징주의 시인 랭보가 그의 어머니의 신앙적 태도와 교육에 반항하면서 필경 삶의 궤적을 일탈과 파행으로 이끌었음에 비추어 볼 때 모리악에 있어서의 가톨릭신앙은 일단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궤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내면세계의 고뇌 즉 신에 대한 의혹과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식의 첨예함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모리악은 고통받는다. 여기에 육체적 괴로움까지 더하여 지면서 죽음에 이르는 길목에서 다시금 신의 은총을 받아 소생하게 된 체험은 향후 모리악의 일생을 통하여 커다란 각인을 형성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 서남부 보르도시에서 태어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밑에서 자라났다. 첫 시집「합장(合掌)」(1909)으로, 당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모리스 바레스에게 인정받고 데뷔한다. 1차대전중 위생병으로 참전하다가 의병제대한 후 문학에 몰두하면서 처녀작「사슬에 매인 어린이」(1913)에 이어 「문둥이에의 입맞춤」(1922)으로 작가적 역량을 뚜렷이 한다.

「불의 강」(1923)에 의하여 일약 문명(文名)을 드날리게 되는데「사랑의 사막」(1925)으로 아카데미소설대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연이어 우리의 논의대상인「테레즈 데케루」(1927)를 위시한 일련의 걸작을 발표하면서 전후 보수적 가톨릭과의 중요인물로 공산주의와 실존주의에 강력한 반대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1952년 노벨문학상이 이 노(老)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재확인시켜 주었으며 삶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정력적인 집필활동을 통하여 신앙적 확신의 문학적 변용이라는 프랑스 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특징적인 양상을 구현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모리악의 문학사상은 신앙, 현실, 본능, 무의식 등의 개념에 투사시켜볼때 흥미있는 비교를 제시해준다. 우선 모리악이나 지드 모두「관능」이라는 대상에 깊이 경도되어있다. 무의식의 혼돈된 힘을 이용하려고 시도한다. 프랑스 전통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진실을 굽히지 않고 도도한 사상개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두 작가는 유사하다. 그러나 일견 자기신앙에서 해탈한듯한 개신교도인 지드는 더 완전한 자신이 되기 위하여 아무런 거리낌과 뉘우침도 없이 자기의 모든 본능을 탐닉한다. 이에 비추어 모리악은 끝끝내 스르로의 신앙에 충실하면서, 은밀하지만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관능과 불안, 혼돈에 신앙의 문제를 이끌어 들이도록 노력하였음을 그의 문학연보는 밝혀주고 있다.

특히 19세기 이후 프랑스의 많은 시인, 작가들이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고향에서의 추억과 경험, 거기서 우러나오는 상상력과 환상을 그 지방의 풍물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이 모리악도 작품세계의 주종적 제재와 배경을 그의 고향에서 끌어내고 있다. 파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그 어느 지방보다도 보수와 폐쇄성이 견고한 보르도부근의 낡은 전통과 인습을 우선 독자들에게 세밀히 묘사해준다. 그의 많은 작품들에서 우리는 시골의 가정생활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철의 기록을 읽어볼수 있다. 그것은 개인과 가정 또는 사회, 신앙의 힘과 육체의 마성(魔性)사이의 갈등, 극단의 에고이즘과 종교의식의 대립등 각기 다채로운 상황설정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다. 아집과 탐욕, 욕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추악한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특히 독자적인 독백의 수법을 원용하여 교묘하게 펼쳐놓는다. 신없는 인간의 참상이 실로 적나라하게 그러나 흥분이나 과장됨없이 고전적 기품과 심각성을 유지하면서 심리소설의 백미(白眉)를 제공해준는 것이다.

모리악의 대부분의 소설은「자연」과「은총」그리고「죄짓는 육신」과「속죄하는 신앙」을 길항관계로 설정하고 이것의 해소과정을 모티브로 삼고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항용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치욕의 맨밑바닥까지 빠져들고 급기야는 완벽한 자기혐오를 체험한다. 여기서 파멸하고 말 것인가. 모리악의 호교론은 은총의 도움에 힘입어 다시 구원의 길로 올라오도록 배려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테레즈 데케루」가 출간된 것은 1927년이었다. 다다, 초현실주의가 황폐한 정신계를 풍미할 무렵인 이즈음은 사회의 전박적 혼란이 모든 기존질서와 의식의 파괴를 부추기는 시기에 해당된다. 종전까지 절대며 최선이라고 믿고있던 기성가치관의 몰락에 따르는 의식구조의 변화와, 하계를 드러낸듯 해보이는 부르즈와 사회의 인습에 대한 반감이 크나큰 영향력으로 다가서던 위기의 상황이 설정되고 있다.

주인공 테레즈 데케루는 결혼, 가족, 사회, 고정관념 등에 결연히 맞서 도전한다. 테레즈라는 인물속에 바로 모리악 자신이 체험하는 고뇌와 갈망이 투영되고 있다. 자기 죄를 속죄하고 삶의 종말에 이르러 빛을 발견한다는 역정(歷程)에서 우리는 모리악이 겪었던 내면세게의 모험을 어렵잖게 짚어낼수 있다.

과묵하고 이지적이지만 선병 질과 신경증의 여인 테레즈는 놀랍게도 남편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다. 당시 부르조와계층이 무엇보다도 아끼고 염려하는 가문의 전통, 체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남편이 본의아니게 관대한 진술을 해준 덕택에 테레즈는 공소기각으로 풀려난다.

남편에게 돌아가는 작은 기차속에서 테레즈는「아르즐루즈의 무서운 고요함속에서」용렬하고 독단적이면서 다혈질인 남편과 함께 살았던 회상하기 싫은 과거를 돌이키게 된다. 작품의 3분의2가량이 시름겨웠던 시절의 몽상으로 구성되어 흡사 영화에서의 회상장면이 현실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이야기를 이끌듯이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테레즈의 삶에 동참하고 어느새 은밀한 내통자가 되어 버린다.

소녀시절-우정-경혼-환멸-질투 등 미묘한 여성심리의 변모가 흐트러짐없는 독백의 흐름을 타고 이어진다. 마지막 단계의 회상에서는 테레즈의 범행에 가장 가까운 과거가 전개되는데 범죄의식의 구체화와 실행과정을 돌이키면서 다시 이야기는 현실로 귀착된다. 테레즈 자신에게도 스스로의 수수께끼가 잘 풀리지 않는다. 이 부분에 이르러 독자들의 흠미가 고조되는데 집에 당도한뒤 거친 남편에게 설명하기를 단념하고 그로부터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소작인의 감시아래 유폐생활에 들어간다. 결국 테레즈에게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파리로 보내줌으로써 작품은 종결된다. 이과정을 통하여 테레즈와 집안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나 상호이해도 없이 오직 집안의 위신을 지키려는 목적아래 기계적인 과정이 전개될 따름이다.

- 테레즈는 술을 조금 마셨고 많은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행복한 여자처럼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정성스레 뺨에 분을 바르고 입술을 칠했다. 그런 다음에 길거리로 나가 정처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끝맺는 작품에서는 표면상 그 어떤 명료한 구원의 양산이나 확실한 은총의 발견도 찾을 수 없다. 모리악자신의 체험과 기억에 남아있는 두여인 하나는 보르도 중죄재관소에서 본 적이 있었던 남편 독살혐의로 피소된 여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작은 시골의 어느 농가에서 시집식구와의 불화로 숨막히듯 출구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젊은 여인-이둘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수정변용된 일상사의 개진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1938년 가행된 단편집「잠수」에서는 두개의 단편「의사집의 테레즈」와「호텔의 테레즈」가 수록되었고 1935년「밤의 종말」에는 남편독살혐의를 받던 때로 부터 15,6년이 지난뒤의 이야기를 이어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45세가된 테레즈가 평소에 별반 애정을 못느끼고 소원하던 자기 딸 마리와 재회하면서, 병들고 지친 아르즐루즈로 데려오고, 삶의 종말이 가까워온 이 여인을 드디어 용서한다는 줄거리가 계속 다루어지면서 테레즈의 이야기는 일련의 연작형식으로 하나의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테레즈 데케루」한 작품을 통하여서는 신에의 외면, 회심, 신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 등 일련의 과정을 전부 조감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모리악이 생애를 통하여 천착할 구원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와 단서제공으로서 이해될 수있다. 모리악의 작품세계가 제시하는 암담하고 비참한 세계-악과 타락의 의식은 실로 인간의 삶이 무한한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악의 시련을 통하여 신에게로 나아감을 묵시적으로 되풀이한다.

- 테레즈, 나는 고통이 그대를 신에게로 인도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하고 있는 두가지의 동시적인 청원일신(請願一神)을 향하여 상승하고자 하는 정신성과 악마에게로의 갈망을 느끼는 타락의지의 동물성-이 두갈말은 오히려 하나의 갈망으로 통합될수 있지않을까. 왜나하면 신을 향한 순수했던 갈망은 원죄이래 그 대상을 잃고 지상에서 악마적인 욕망의 샘물에서 그 갈증을 풀고있는 까닭에서이다. 이 복합적인 갈망이 테레즈의 삶, 의식세계를 그려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보여주는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해준다.

테레즈의 방황과 탈선 그리고 범죄는 한 영혼이 이 지상에서(캄캄한 어둠속을 등불도 없이 헤매이듯)더듬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 여정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신적 운명이 작용하고 있는 까닭에 테레즈는 계시에 의하여 구원을 받기까지 은총도 신도없는 세계에서 영혼과 육체를 찢긴채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여기에 더하여「테레즈-테케루」에서는 테레즈의 영혼과 육신의 우울뿐 아니라 배경과 게절까지도 함께 비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칠고 이기적이면서 투박한 남편, 다른 세계에 살고있는 아둔하고 형식적인 시집식구들이 테레즈를 숨막히게 한다.

모리악은 테레즈라는 주인공이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자행하는 범죄와 염세감정 그리고 그 복잡한 인과관계를 명석하면서도 낱낱이 파헤쳐 보여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따뜻한 자비심이 함께 하면서 독자들에게 테레즈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랑해달라는 무언의 주문이 그 치지 않고 있다. 지드도 모리악에게 보낸 편지에서『당신의 위대한 예술이 독자들을 공범자로 만들었습니다』라고 공감을 표시한다. 「테레즈 데케루」를 읽은 독자들은 그녀를 매도하고 비판하기 전에 우선 동정이 앞서게 되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당장 판독할 수 있는 열쇠를 찾기 힘든 까닭에서이다.

「신적 운명」-이 오묘하고 보이지 않는 끈을 추구하면서 또 독자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모리악은「가톨릭작가」가 아니라「소설을 쓰는 한 가톨릭신자」이기를 무엇보다도 염원하다. 「인간의 드라마」를 충실히 재현하면서 신없는 인간의 비참방황하는 영혼들이 끝내는 하느님의 사람안에 맞아들여지고 이해되고 그사랑 자체속에 녹아들어갈수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자기 포기를 통해서만 이 사랑에 도달할 수있으므로, 이 지상의 온갖 유혹을 뿌리치는 참으로 힘든 노릇이 아닐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테레즈 데케루」의 숙명적 여정을 통하여 더없이 혼돈된 인간의 본능이 어떻게 가톨릭적 미덕으로 변화되는가를 지켜보는 가슴벅찬 순례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규식ㆍ안젤로ㆍ대전 태평동본당ㆍ한남대 불문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