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잠언 8,22-31 제2독서(로마 5,1-5) 복음(요한 16,12-15)
사제에게 강론 준비는 가장 소중한 직무이지만 벗을 수 없는 멍에라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멋진 글과 말을 통해서’ 단번에 신자들을 감동시키고 싶었던 새내기 사제 시절엔 그 무게감이 만만찮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의 복음에서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구절이 해방감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모자람을 인정하고 제 수준을 존중하며 제 꼴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입니다. 이후 저에게 강론 준비는 기쁨의 작업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강론은 사제가 체험한 삶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일이며 광활한 당신 천국의 영역을 신자들과 함께 엿보는 즐거운 작업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도 난해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심오하고 골 아프게 ‘공부’ 시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느낀 바를 솔직히 나누려 합니다. 더러 무겁고 혼돈스럽게 여겨지는 ‘신비’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을 벗겨드려서, 늘 친근하고 진솔히 다가오시는 주님과의 조우를 돕고 싶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삼위일체의 주님을 이해(?)하게 된 ‘터닝 포인트’를 들려드리고 싶은데요. 저에게는 신학생 시절,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녹색 눈빛의 독일인 교수 신부님께 들은 얘기가 강렬한 봄날의 기억으로 뇌리에 박혀있습니다. 그 수업 이후, 저는 더 이상 삼위일체가 난해한 하늘의 신비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 삶에 각양의 축복을 주고 계신 주님의 마음이며 손길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는데요. 교수 신부님께서는 성령하느님은 “아주 수줍음이 많다”는 뜻밖의 표현으로 저희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물며 성령은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설명을 곁들이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오직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더더욱 예수님께만 집중하게 만든다는 뜻이었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되, 더더더 성자이신 예수님과 친해지도록 이끌어 주실 뿐이라는 해석이 명료했던 덕일까요? 그러기에 성령인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앞세우게 된 다시던 차분한 어조도 여태 생생하군요. 무엇보다 그 수업의 결정타는 성경을 읽어야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었는데요. 성령이 오신 목적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여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결국 스스로 성령을 받았다면서 성령에 관해서만 떠들어댄다면 실제로 성령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며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셨지요.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임하셨다고 눈에 띄는 특별한 자격증을 주지는 않지만 복음에 절대적 순명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에 성령을 받으면 복음적 삶에 순명하고 헌신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는 자신은 숨고 서로를 드러내 높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선물하시는 당신의 생명이 바로 ‘성령’이시며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니까요. 성경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인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주셨다고 밝히는 이유일 텐데요. 더불어 성령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는 힘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깨닫게 되는데요. 그때, 제자들이 행한 일 전부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니까요.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