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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김원봉,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 / 이원영

이원영(프란치스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입력일 2019-06-11 수정일 2019-06-11 발행일 2019-06-16 제 314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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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현충일에 있었던 대통령의 추념사가 정치권에서 공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좌우가)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는 말이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1948년 월북해 조국해방전쟁, 즉 6·25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 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며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약산 김원봉은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과 ‘밀정’을 통해 재조명되기 시작한 인물이다. 영화 ‘암살’에서는 조승우가, 영화 ‘밀정’에서는 이병헌이 연기했던 김원봉은 의열단의 의백(단장)이었으며, 조선의용대 대장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다. 그리고 1948년 월북한 이후 북한에서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지만, 1956년 8월 파벌 간 대립으로 인한 ‘종파사건’ 이후 숙청됐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가였던 김원봉은 왜 월북하게 됐을까?

일제 강점기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고등경찰 출신들은 미군정 하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국립경찰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은 권력의 비호 속에 소위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애국경찰이라고 위세를 부리는,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됐다. 노덕술에게 가장 크게 표적이 됐고 실제로 그에게 체포까지 당했던 사람이 바로 김원봉이었다. 일제로부터 김구 주석보다 더 큰 현상금이 걸렸던 김원봉이 일제 고등경찰이 다시 위세를 부리고 있던 남한의 현실에서 어떤 자괴감을 느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1948년 남북 협상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그는 그대로 북한에 남았던 것이다.

필자는 김원봉을 둘러싼 공방을 보면서 역사 논란은 과거의 해석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돼 온 ‘현재’ 정치 세력 간의 정체성 논쟁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 정치 세력의 정체성 재구성이 과제가 될 것이다. 즉 과거 이념을 넘어서는 정체성 정립이 과제이며, 이러한 점에서 교회의 역할이 강조돼야 한다. 존재하는 역사를 모두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한반도 평화에 입각한 미래의 정체성 재구성 작업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치와 대화와 형제적 연대에 바탕을 둔 미래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희망을 모든 이에게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조화와 화합을 추구하고자 노력할 때,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판문점선언 1주년 메시지)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8)라는 말씀을 실천하려는 교회의 논의와 계획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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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프란치스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