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장주기(요셉)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6-11 수정일 2019-06-11 발행일 2019-06-16 제 314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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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 존경 받으며 20년간 회장직 수행
신둔본당 주보

장주기(요셉) 인물화.

“내가 참으로 이 서양사람 집 주인이오.”

1866년 3월 제천 관장의 문초에 장주기(요셉) 성인은 당당하게 자신이 ‘이 서양사람’, 바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머무는 집의 주인임을 밝혔다. 그 집은 다름 아닌 한국의 첫 신학교인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였다. 관장은 집주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배교를 권하며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성인은 올곧게 신앙을 증언했다.

제2대리구 신둔본당의 주보성인인 장주기 성인은 청빈하고 검소한 봉사의 삶을 살며 회장으로서 교회에 헌신한 인물이다.

성인의 출신지는 수원 양간이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일대가 바로 이 양간으로, 요당리성지가 이곳에 있다. 1803년 태어난 성인은 1827년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성인은 평소에도 두터운 학식과 덕망을 지닌 인물이었다. 성인의 성품과 신앙에 대한 열망은 천주교를 반대하던 식구들이 오히려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양간은 성인의 선교로 교우촌으로 변화했다.

모방 신부의 추천으로 회장이 된 성인은 더욱 모범적인 신앙 활동을 펼쳤다. 성인은 20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했는데,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 동분서주하면서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했다. 성인은 학식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신앙에도 균형이 잡힌 인자한 회장이었기에 신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성인은 신앙뿐 아니라 많은 경험을 쌓고 노련하게 교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극심한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꾸렸을 뿐 아니라 인근 교우촌에도 도움을 주고, 선교사가 다니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보필했다. 특히 10년 이상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신학교를 운영했다는 점도 성인의 수완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성인은 1845년 박해를 피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산과 전답을 모두 정리하고 제천 배론으로 이사했다. 배론에 정착해 생활하던 중 1853년 베르뇌 주교가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푸르티에 신부를 임명하자, 성인은 자신의 집을 신학교 건물로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 신부들의 보좌와 신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했고, 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작물을 신학교에 봉헌했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에 들이닥치자 성인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푸르티에 신부가 성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헌에게 돈을 주며 성인을 석방시켰다. 푸르티에 신부가 반강제로 돌려보낸 성인은 5일 후 노루골 인근 신자의 집에서 다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신앙을 굽히지 않은 성인은 서울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성인은 짚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했는데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 전해진다.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늘 자녀들에게 “순교해 예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던 성인은 마침내 충남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