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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부활, 파이턴 003!

이연세(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9-06-03 수정일 2019-06-04 발행일 2019-06-09 제 3148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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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새벽,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싱그럽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고운 자태를 뽐내는 덩굴장미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시간보다는 마음이 더 바빴겠지요. 25년 전 조종사와 항공기로 만나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임무를 수행한 애기(愛機)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을 다시 만나듯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파이턴 003(python zero zero three)! 1988년 고등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수도권의 한 항공대대로 보직을 받으며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파이턴 003는 생산된 지 10년 된 비교적 신형에 속하는 UH-1H 헬기였습니다. 대대에서는 주로 중요 임무에 편성을 했고, 조종사들 또한 가장 선호하는 항공기였습니다. 저는 약 5년간 대대에서 근무하며 파이턴 003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후, 국방대학원에 입학하게 되면서 헤어졌습니다.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했던가요. 2년 전 가을, 저는 인생의 전부라고 할 군문을 뒤로하고 대학 강단의 문을 열었습니다. 항공을 사랑했기에 항공인을 꿈꾸는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실습용 교보재가 불비한 환경에서 애를 쓰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좀더 나은 교육여건을 만들어 줄 수는 없는지 고민했습니다. 마침 육군에서는 기령(機齡)이 오래된 UH-1H를 퇴역시키고 있었죠. 물론 41년 된 파이턴 003도 퇴역하는 항공기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대학에서는 퇴역하는 항공기를 실습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육군본부에 대여를 요청했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많은 헬기 중에서 파이턴 003가 배정된 것입니다.

파이턴 003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다섯 시간의 여정 끝에 남쪽바다가 보이는 진해에서 25년 만에 해후했습니다. 날개가 분리된 채 온몸이 커버로 감싸인 애기를 보자, “아” 하는 작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잠시 기수 부분을 어루만지며 함께 써 내려갔던 시간들을 회상했습니다. 낙엽이 날릴 정도로 낮은 침투비행을 실시했던 야간공중강습, 한여름 밤바다를 환하게 수놓았던 조명탄 투하훈련, 겨울에 사용할 식량과 유류를 공수하기 위해 하루 종일 엉덩이가 배길 정도로 비행했던 일 등…. 그 시절 젊은 혈기로 애기만 믿고 겁도 없이 비행했던 무모함에 미소가 머금어졌습니다.

이제 파이턴 003는 푸른 창공을 향한 비상을 멈췄습니다. 41년간 굉음을 울리며 우리나라 곳곳을 누비면서 전설 같은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조용히 눈을 감은 것이죠. 하지만 이대로 생명을 다한 것일까요. 이 헬기는 학생들의 꿈을 현실로 바꿔 줄 소중한 실습 장비로 부활했습니다. 새로 부여받은 소명을 안고 다시 학생들과 동고동락하겠지요. 항공기가 퇴역하듯 인간의 삶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 또 어떤 모습으로 새롭게 부활할까요?

이연세(요셉) rn예비역 육군 대령rn동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