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모든 것을 새롭게"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9-05-14 수정일 2019-05-15 발행일 2019-05-19 제 3145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부활 제5주일
제1독서(사도 14,21ㄴ-27)  제2독서(묵시 21,1-5ㄴ)  복음(요한 13,31-33ㄱ.34-35)

제 이메일에는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하면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라는 꼬리말이 달려 있습니다. 저와 연락하시는 분들께서 무엇이나 어떤 일에서나 주님을 기억하여 복음을 살아가시길 바라는 청원을 담았지요.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수없이 벌어지는 삶일지라도 모든 것, 모든 순간에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응답해 드릴 때, 아주 작고 소소한 일도 ‘거룩’한 주님의 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이신 그분과 함께하면 무엇이든 하늘의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히 말씀드립니다. 사제로서 확신하며 권고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를 전혀 ‘새 것’으로 만들어주셨다는 것, 이미 새로운 삶의 모범을 살아갈 힘을 제공하셨다는 진리를 깊이 새겨 살아갑시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19)라는 주님의 약속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새로워지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 생명을 기쁘게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우리는 그날 “하느님 친히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 주며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바로 그 주인공이니까요.

오늘 1독서는 1차 전도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순탄치 못했던 여정을 전하는 글임에도 오히려 기쁨과 감사로 그득한 것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진짜로, 우리에게 기쁨만을 주고 계신다는 진리를 절절 깨닫게 되는데요. 그 험한 선교 여정을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맡기고 이겨냈다는 구절에 울컥했습니다. 무엇보다 ‘새 신자’를 맞아들이는 기쁨이 힘의 원천이었다는 고백에 선교를 위해서 애쓰시는 본당 교우님들의 모습모습이 눈에 선해서 저절로 성호경을 긋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에 걸음걸음을 맡기고, 낯선 사람들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때론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할 것이고, 심한 배척에 열정이 꺾이는 경우도 수없이 많을 테니까요. 어쩌면 오늘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라는 성경의 표현에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도 깊은 감회에 젖어들 것만 같은데요. 주님의 일을 하며 지내는 행복에 겨울 때, 정말로 간 크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거듭 배웁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선교를 위해서 겪어야 했던 고생은 엄청났습니다. 더해서 2차 3차 여행에서는 더 큰 고통의 여정이 펼쳐졌습니다. 그들을 지탱 시켜준 힘은 틀림없이 내일을 계획하지 않고, 다만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던 덕이었을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희망을 살아내는 것이 복음의 행복을 누리는 최고의 비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고난의 길은 가고 또 걸어야 할 우리네 삶의 길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문득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께 전도 여행 중에 제일 혼돈스러울 만큼 곤란하고 당황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묻게 되더군요.

그리고 두 분께서는 입을 모아 리스트라에서 설교를 했을 적에 군중의 뜨거운 반응을 만났던 때라고 말할 것이라 어림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자칫 ‘교주’로 등극 될 위기가 닥쳤으니 말입니다. 하물며 ‘신’으로 추앙을 받게 될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작별 인사’.

따져보면 이런 상황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하지가 않은데요. 자칫,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거나 ‘엄지 척’하며 으뜸이라 추켜 줄 때, 누구나 고무되기 마련이니까요. 그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인 양 으스대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좀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일을 좀 더 폼나게 하려는 ‘나쁘지 않은’ 포부에 젖어 교만의 뾰루지를 키우게도 되니까요.

솔직히, 애쓰고 최선을 다해서 이룬 성과가 제대로 평가받는 것이 그른 일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이 꼭 어긋나고 죄 된 소망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몹시 민감해야 합니다. 설사 우리가 맡은 일을 완전무결하게 ‘완수’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마음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바로 그 짧은 순간에 스민 생각이 삶을 뒤바꾸어 흔들어버릴 수가 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한 후에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일면 당연한 결과임에도 때론 유혹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시험으로 작용하는 걸 보면, 참으로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딱 맞는다 싶군요. 만약에 그날,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가 우쭐해져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심에 빠졌더라면…… 결코 성인 바오로와 성인 바르나바는 탄생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 없는 영광을 취하라고 속삭입니다. 어렵고 힘든 환란을 굳이 자초하는 이유를 묻고 슬프고 힘든 십자가를 피할 방법을 수없이 제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스카리옷 유다는 무엇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냐고, 왜 굳이 십자가 근처에서 서성대냐고, 그 추한 방법을 피할 수 있다고, 더 나은 방법을 찾으라고 속살대는 사탄의 꼬드김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어쩌면 유다는 넓은 길을 마다하고 좁고 험한 길로 들어서는 예수님이 답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굳이 굳이 고통을 자초하시려는 주님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때를 답답해하며 하느님의 방법이 의아한 경우가 수 없으니,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유다가 주님께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요인이 스스로 하느님 자녀의 고귀함을 간과했던 탓이라 싶습니다. 자기가 지녔던 과거의 사고방식에 붙잡혀서 새로움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결과라 싶어 안타깝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이스카리옷 유다가 외면했던 바로 그 십자가를 온 힘을 다해서 짊어졌던 사람들이 천국에 있다고 밝혀줍니다. 그곳 천국에는 희생의 땀으로 온몸이 젖고 얼굴에 눈물이 흥건한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알려줍니다.

새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마련해두신 그 찬란한 도성에서 하느님께서 손수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은 모두가 죽음으로, 슬픔으로, 괴로움으로 피와 땀과 눈물에 젖어 울부짖었던 사람들이라고 밝힙니다. 이 얼마나 충분한 위로이며 든든한 희망의 말씀인지요?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선포인지요?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던 그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들게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끝없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정의 앞에 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에 보답하고자 서로 사랑하고 더 사랑하려 애쓰며 끝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하늘의 사람이 부활인입니다.

성모성월, 어머니 성모님께서 우리 “마음을 누르는 죄의 사슬”을 신속히 벗어나도록 순간마다 붙들어 주시길 청하며 오직 기쁘고 행복한 새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