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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재난보도가 재난이 되진 말아야 / 김지영

김지영(이냐시오)rn전 경향신문 편집인
입력일 2019-05-07 수정일 2019-05-07 발행일 2019-05-12 제 314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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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⑫
요즘 ‘기레기’라는 단어를 흔히 보고 듣는다. 예전에는 없던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사람들 입에서, 글에서 오르내린다.

위키피디아 사전에서 내린 정의는 이렇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 대한민국에서 허위사실과 과장된 부풀린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트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과 그 사회적 현상.’

이 표현이 한국 국민들에게 일상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건 직후부터다. 재난주관 방송사인 KBS를 비롯해 대부분 매체들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보도를 하면서 유족과 국민들로부터 거세게 지탄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KBS의 일부 젊은 기자들이 사내 전산망에 ‘기레기 저널리즘에 대해 반성합니다’라고 반성문을 올렸다.

당시 매체들은 경기도 교육청이 단원고 학부모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등을 근거로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보내는 등 정확하지도 않은 속보에 급급했다. 기자나 앵커부터 흥분했고, 피해자나 가족들에게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 심경을 물었다. 구조된 학생과 인터뷰를 하면서 “한 명의 학생이 사망했다는 걸 혹시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어 그 학생을 울리고, 구출된 6살 어린이에게 “너희 부모님은 어디 갔느냐”고 묻기도 했다. 현장 구조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데도 수많은 장비와 인력이 총출동해서 작업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언론보도는 현장 관계자들과 국민들에게 많은 혼선을 주고 피해 가족들에겐 이중삼중의 충격과 상처를 주었다. 오죽하면 피해자 가족들이 현장에서 재난보도준칙을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다. 한국 언론계의 치욕적인 별칭 ‘기레기’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지난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를 겪고도 재난보도 준칙을 마련하는 데에 미적대던 한국언론계는 그로부터 11년 뒤 이같은 ‘세월호 보도 참사’ 후에야 한국신문협회, 한국방송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윤리위원회 공동으로 준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준칙의 활자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더 많은 혼란과 희생이 필요한 것일까. 세월호 이후에도 큰 재난사고가 많이 발생했지만 원천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었다.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그때뿐, 재난 대비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감시기능을 발휘하는 매체도 별로 없었다.

세월호 참사 이듬해인 지난 2015년 상반기. 이번에는 메르스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초비상에 걸렸다. 그렇지만 이때도 많은 매체들이 재난보도의 제1원칙인 정확성을 지키지 않고 속보에 집착했다. 당시 일부 신문들은 메르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삼성서울병원 의사가 뇌사 상태에 빠져 가족들이 장례 절차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오보를 내보냈다.

또 다른 일부 신문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메르스 환자가 자택격리 조치에도 불구하고 1500여 명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했다’거나 ‘확진 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도심을 돌아다녔다’고 전했다.

그리고 지난달 4일 강원도. 고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크게 번지고 있는데도 재난방송주관사인 KBS를 비롯해 많은 방송사들이 몇 시간이나 늦게 늑장 방송을 했다. 지상파 방송들은 그 시간에 한가한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었다. KBS 기자는 현장부근에 가지도 않고 현장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거짓보도를 하는가 하면 방송들은 재난보도에 필수적인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수화방송도 하지 않았다.

재난보도 준칙에서 취재 및 보도에 관한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정확성, 인명구조와 수습 우선, 피해의 최소화, 예방정보 제공, 비윤리적 취재금지, 통제지역 취재 주의, 현장 데스크 운영, 무리한 보도경쟁 자제, 공식정보 취급, 취재원 검증, 유언비어 방지, 선정적 보도 지양, 감정적 표현 자제, 신상공개 주의, 피해자 보호, 피해자와 미성년자 인터뷰 신중, 정정과 반론보도 등.

우리 언론들이 이 같은 재난보도 준칙을 잘 지키려면 아직 멀었다. 만약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이 이 칼럼란과 같은 미디어 리터러시를 익혀, 매체들을 감시하고 비판한다면 그들이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는 날이 하루라도 더 빨리 올 것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영(이냐시오)rn전 경향신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