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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오메트르 신부의 성모님 사랑 / 윤민구 신부

윤민구 신부 (원로사목자)rn
입력일 2019-04-30 수정일 2019-04-30 발행일 2019-05-05 제 314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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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트르(1837~1866) 신부는 우리나라 103위 성인 중의 한 분이다. 1863년 6월 입국해 주로 오늘날의 교구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866년 3월 30일 충남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그래서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손골성지에서는 특별히 오메트르 신부를 공경하고 있으며 수지 신봉동성당에서는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성모님의 달’을 맞아 오메트르 신부의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사랑을 소개하려 한다. 오메트르 신부는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65년 5월 풍토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서울에서 한의사를 보내준 베르뇌 주교의 특별한 배려로 병을 털고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활동을 재개할 수는 없었고 같은 해 10월까지는 미리내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이때 오메트르 신부는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신자들에게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일을 했다. 1865년 10월 말 미리내에서 쓴 오메트르 신부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제 방은 벽지를 발라 경당으로 꾸몄고, 그곳을 베롤 주교님이 주신 십자가의 길로 장식했습니다. 제대 위 벽을 파고 나무로 벽감(壁龕)을 짜 넣은 다음, 성모상을 설치했지요. 그 위에는 조선어로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티 없으신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조선의 각 사목 구역마다 다양한 호칭을 가진 성모님을 수호성인으로 모셨는데, 제가 담당한 구역은 〈성모취결례(聖母取潔禮) 구역〉입니다. 그러니 위의 문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을 신자들이 이 경당에 와서 이 선하신 보호자 성모님께 기도드리거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거나, 기타 신심 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성모취결례축일’은 구약의 규정에 따라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이 40일째 되는 날인 2월 2일 제물을 성전에 바치며 정결예식을 거행한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같은 날 맏아들 봉헌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도 성전에서 봉헌했기 때문에 요새는 예수님께 포커스를 맞춰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오메트르 신부가 미리내에 성모님 벽감을 만든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오메트르 신부의 고향에 가보면 생가 벽에 이미 벽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부모님의 배려로 어려서부터 그렇게 기도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오메트르는 1855년 소신학생이었을 때 신학교 ‘승리의 성모회’의 회장이 됐다. ‘승리의 성모회’는 파리에 있는 ‘승리의 성모성당’ 주임이었던 샤를 데주네트 신부가 1836년에 만든 신심 단체다. 오메트르가 대신학생이 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생활할 때는 자주 파리의 ‘승리의 성모성당’을 방문해 기도드리고, 미사를 청해 봉헌하곤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모신심의 뿌리에는 오메트르 신부와 같이 박해시대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신부들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오메트르 신부와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칼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오메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윤민구 신부 (원로사목자)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