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그럴 바에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 / 윤민구 신부

윤민구 신부(원로사목자)rn
입력일 2019-04-23 수정일 2019-04-23 발행일 2019-04-28 제 314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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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8년 6월 말 소위 ‘원로 사목자’가 됐다. 은퇴를 한 건데 우리 교회에서는 ‘신부에게는 은퇴가 없다’며 붙인 이름이 ‘원로 사목자’다. 은퇴를 했으니 조용히 지내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거냐’고 자꾸 묻는다.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다 보니 꼭 무슨 일을 해야 되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악마의 유혹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마는 요새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바쁘게 살라고 하는 것 같다. 바쁘게 살아야 뭐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지고, 입에서 “바쁘다, 바빠”라는 말을 하며 살아야만 잘 사는 것처럼 보이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악마의 유혹이다. 난 그것이 유혹인지 몰랐다. 그래서 많이 바쁘게 지냈다. 그러다 보니 건강이 많이 상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지만 육체의 건강만 상한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도 건강하지 못하다. 미사 때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하며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제이기를 축원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그랬나’ 반성해 보면 악마의 유혹에 빠져 바쁘게만 사느라 하느님의 선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창조 능력을 나누어 주셨다. 그런데 창조 능력은 조용히 사색하고, 묵상하며 살 때 발휘된다. 바쁘게만 지내면 다 묻히고 마는 것이다.

성 토요일 파스카 성야 말씀 전례에서 제5독서로 읽는 이사야서 55장 2~3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 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묵상하며 살아야 하느님이 주신 창조 능력을 발휘하여 나의 삶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만들어 갔을 텐데, 양식도 아닌 것을 찾으며 바쁘게만 살면서도 그것이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지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 혼인 주례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양보하라는 말 대신에 먼저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다 보니까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며 하루에 30분도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부부들을 봅니다. 왜 결혼을 했는지도 잊은 채,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도 잊은 채 말입니다. 그럴 바에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사실 나에게 한 말이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에만 몰두하며 사느라 진짜로 중요한 일을 잊고 살 바에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이었다. 은퇴를 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니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하지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하느님의 은총 덕이다. 이제부터는 더 많이 내려놓고 조용히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야겠다.

윤민구 신부(원로사목자)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