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땅에서의 천국체험, 부활!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9-04-16 수정일 2019-04-16 발행일 2019-04-21 제 314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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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  제2독서(콜로 3,1-4)  복음(요한 20,1-9)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아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시작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도 진정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진정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은 따르던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을 위한 전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허술한 모습이 맘에 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긴가민가하는 모습, 의심하며 우왕좌왕 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히려 정겹습니다. 뭐랄까…, 들쭉날쭉한 우리도 그들처럼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투박하고 모난 돌멩이 같던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다듬어 내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베드로처럼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겁니다.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일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마르코복음은 베드로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르코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는데요. 마르코복음에는 유난히 베드로의 실수담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베드로가 자기 허물을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았던 결과일 것이라 추리해 보는데요. 주님과 함께했던 3여 년, 주님의 속을 태우며 이랬다저랬다 했던 자신의 모자람을 끝내 품어 주신 주님 사랑을 추억하며 새 삶으로 도약하도록 이끌어주신 은혜에 감격했던 베드로의 고백이라 싶은 겁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실수까지도 성숙을 향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주실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라 헤아려집니다. 이렇듯 자신의 허물을 까발려 들려주면서까지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사랑을 일깨워주는 베드로의 격려에 힘입어 오직 믿음으로 희망과 사랑을 살아낼 각오를 다져봅니다. 하여 지금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내내 ‘축복의 순간’을 살아가는 참 기쁘고 행복한 부활의 주인공이 되시길 기도드리며 글을 엽니다.

솔직히 성경에서 만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모범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망스러운 지경입니다. 어쩌면 복음서 저자들도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 드라마틱한 소재라 여겼기에 다투듯 믿음인의 여정을 일깨우는 소재로 삼았을 것이라 짐작해 보는데요. 베드로의 독특한 면면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를 꿈꾸는 우리에게 주저앉지 않는 용기를 선물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실수를 한 후에도 구질구질 변명하거나 숨지 않고 내내 주님 곁에 머물렀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야말로 베드로와 우리의 ‘다른’ 모습이니까요. 우리 같으면 적어도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저질렀으면, 민망해서라도 죄송한 표정으로 쭈뼛대며 멀리 물러서는 게 당연지사일 듯한데, 베드로는 그렇지가 않았으니까요. 뻔뻔하다 싶을 만큼 줄기차게 주님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믿음이란 베드로처럼 ‘낯에 철판을 깔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뻔뻔함이야말로 베드로의 최대 강점이라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뻔뻔하게’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의탁하는 삶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최고 요소라 새깁니다.

안토니오 브랄라의 ‘그리스도의 빈 무덤 발견’.

솔직히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허물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려는 다짐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만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끝내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신앙적인 고백은 베드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라 싶습니다. 부활인의 요건은 이처럼 쉽고 간단합니다. 때문에 신나고 벅찬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잘나고 대단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더없이 못나고 모자라서 그래서 더욱 우리를 애틋해 하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피 흘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 사업으로 제일 처음 구원한 영혼은 주님의 뜻을 한 치도 어김없이 살아낸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강도였습니다. 당신 아들의 수난공로를 이토록 짧고 단순한 믿음의 고백과 맞바꿔주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이렇듯 부활은 우리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이해되지 않을 만큼 벅찬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서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은총입니다. 이렇듯 내가 얼마나 온 힘을 쏟아 신앙을 실천했는지에 따른 포상이 아니기에 복음입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당부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애쓰지 말라고, 다만 함께 당신 곁에 있어달라고 청하실 터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부활인의 긍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에 성숙하고 사랑의 참맛’을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지혜의 소유자이기에 어둠을 벗어난 빛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진정한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매일 매 순간, 영혼을 헹구고 행실을 고쳐나가는 일에 부지런해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은 나한테 은혜인 만큼 다른 이에게도 쏟아지고 있는 은총임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영광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내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늘의 팡파르입니다. 변치 않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모두 베드로처럼, 달라진 요한처럼 살아가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내는 지혜의 삶”으로 도약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는 우리이기를 마음 모아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