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활 르포 / 안산생명센터에서 만난 세월호 유가족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19-04-16 수정일 2019-04-16 발행일 2019-04-21 제 3141호 1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그 후로 5년… 다시 만날 날 그리며 오늘도 살아갑니다”
유가족 10여 명 모여 서로 상처 보듬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상담 진행
현실에서 숨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생명지킴이’ 발대해 자원봉사 펼치고 친환경 가방 제작해 수익금 기부
혼자 사는 노인들에 반찬 배달도

분홍색 진달래와 푸른 잎사귀가 봄볕을 머금은 듯 화사한 모습으로 친환경 가방 위에 수놓인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줄기와 꽃잎이 하나씩 더해지면서 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 옆에서는 컵받침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천 위로 몇 번의 붓질을 거치자 컵을 올려놓기가 아까울 만큼 예쁜 그림이 금세 완성된다.

친환경 가방과 컵받침을 만들고 있는 노선자(베로니카·53·안산 와동일치의모후본당)씨와 윤선숙씨는 안산생명센터에서 처음 만났다. 이곳에서 건우엄마와 선우엄마로 불리는 두 사람은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었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현실’에서 안산생명센터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10여 명은 안산생명센터에서 유화를 비롯해 한지공예, 캘리그라피, 친환경 가방 만들기 등 미술수업에 참여해왔다. 미술을 통해 상처를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유가족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하나다. ‘살기 위해서’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유가족들은 가느다란 생명의 빛을 안산생명센터에서 찾고 있었다.

친환경 가방 만들기 작업을 하고 있는 노선자씨.

컵받침을 만들고 있는 윤선숙씨.

매주 화요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유화수업.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완성한 색지공예 작품.

2014년 12월 문을 연 안산생명센터는 세월호 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와 상담 등 상처 회복을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센터는 낙태와 폭력, 자살 예방을 통해 생명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사업 영역이 확장됐다. 지역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상처를 위로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스트레스 완화로 자존감 회복, 상실감 회복 및 신뢰감 형성, 일상회복 및 삶의 의미 찾기 등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에게 예술심리치료와 정신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5년간 다양한 외부 활동도 펼쳤다. 세월호 참사 2주기에는 ‘두 번째 봄’ 콘서트를 개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같은 제목의 전시도 열어 유가족들이 만든 회화, 사진, 패브릭아트, 캔들아트 등의 작품을 한 달 동안 선보였다.

지난해 9월에는 대학생들에게 생명 사랑의 정신을 전하는 의미 있는 활동도 진행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경기 안산 한양대학교 에리카(ERICA)캠퍼스에서 생명문화 캠페인을 벌이며 자살예방과 생명사랑 활동을 홍보했다.

안산생명센터가 생긴 뒤 세상을 떠난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이곳을 찾는다는 노선자씨는 “자식 죽음 팔아서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무너진다”며 “그런 시선들 때문에 타인은 물론이고 가족 앞에서도 마음 놓고 이야기하거나 웃지도 못한 채 5년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같은 아픔을 가진 엄마들이 모인 안산생명센터가 유일하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덧붙였다.

이곳을 찾은 유가족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에코백을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센터는 평일이나 주말 상관없이 언제나 드나들 수 있게 문을 열어두며 유가족을 배려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나 농담을 하며 웃는 모습이 20대 초반의 아들을 둔 여느 어머니의 일상과 같아 보이지만 잠시 흐르는 정적 속에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누구 하나 “괜찮냐”고 묻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유대감으로 서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달래주고 있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유가족들은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2018년 3월 9일 수원교구 안산생명센터에서 열린 생명지킴이 발대미사 후 조원기 신부와 생명지킴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안산생명센터 ‘생명지킴이’로 활동을 시작한 세월호 유가족과 봉사자들이 2018년 4월 11일 센터에서 반찬 만들기 봉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유가족들이 세상으로 나와 자립할 수 있는 활동도 늘리고 있다.

지난해 3월, 유가족 3명을 포함해 총 29명으로 구성된 생명지킴이를 발대해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독거노인 무료 반찬 사업을 통해 안산시 와동·월피동 일대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배달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마스크팩 포장작업을 통해 모은 성금을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주민에게 전달했다. 현재 작업하고 있는 친환경 가방 판매수익금도 폭력 가정 자녀를 위한 장학금으로 쓸 계획이다.

5년이 지났지만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선자씨는 “당시에는 지옥이 이런 곳인가 싶었다”고 회상한다. 죽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살기 위해 찾은 곳이 안산생명센터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게 사순 시기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사순 시기를 보내는 게 힘들죠. 힘든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도 열심히 살고자 하는 건 죄 없이 건우에게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안산생명센터가 없었다면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낼 수 없었을 거예요. 이 곳에서 저는 다시 살아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문의 031-365-4770~3 안산생명센터

※후원 신협 131-017-368171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