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480) 아농 빵알란 모

입력일 2019-04-09 수정일 2019-04-09 발행일 2019-04-14 제 3140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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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필리핀 마닐라에서 특수 사도직을 하는 어느 신부님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그 신부님네 수도회에서 인사이동이 있었으며, 젊은 신부님 한 분이 마닐라로 왔는데, 그분은 1년 동안 영어 공부를 한 후 새로운 선교 소임지로 파견을 준비 중이었답니다. 그 신부님의 성격은 쾌활했고, 항상 적극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분이었답니다. 하루는 그 신부님이 원장 신부님과 어느 지역 공동체 미사에 따라간 적이 있었답니다. 그날 미사는 영어로 봉헌했지만, 성가는 타갈로그어로 불렀답니다.

어느덧 영성체 시간이 됐고, 젊은 신부님은 성체 분배 때 ‘그리스도의 몸’을 영어로 해야 할지 타갈로그어로 해야 할지 고민을 했고, 마음속으로 타갈로그어로 하고 싶었답니다. 암튼 원장 신부님과 성체 분배를 하러 제대 가운데로 갔는데, 원장 신부님은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농 빵알란 모’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런 다음 영어로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하니, 그 아이도 ‘아멘’ 하고 성체를 영했고!

그것을 본 젊은 신부님은 ‘아농 빵알란 모!’를 급히 외웠답니다. 이어서 젊은 신부님도 원장 신부님 옆에 서서 성체 분배를 하려는데, 원장 신부님은 다른 곳으로 가서 성체 분배를 하라는 눈짓을 보냈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젊은 신부님은 주변을 돌아보니, 오른쪽 끝에 긴 줄로 서 있는 신자들을 볼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간 신부님은 신자들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아농 빵알란 모’하며 성체 분배를 했답니다.

그런데 몇몇 신자들은 움찔하며 신부님을 쳐다보더랍니다. 그러자 젊은 신부님은 속으로 자신의 타갈로그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그러는가 보다 생각을 했답니다.

그렇게 성체 분배가 끝나고, 마침 기도 후 퇴장 성가 때 두 신부님은 제의방에 들어왔답니다. 제의를 갈아입던 원장 신부님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신부님을 보며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일 없었는데. 아, 혹시, 내 발음이 우스워서 그랬나 봐요! 제가 ‘그리스도의 몸’을 타갈로그어로 했거든요.”

“정말 그랬어요? 잘 하셨다. 그래 뭐라고 하셨어요?”

“예. ‘아농 빵알란 모’라고 했어요.”

“네에? 아농 빵알란 모?”

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고, 원장 신부님은 한숨과 함께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영어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헐? 그러면 ‘아농 빵알란 모’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에요?”

“그 말은 타갈로그어로 ‘당신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뜻이에요. 그래, 신자들은 ‘아멘’이라고 대답은 하던가요?”

갑자기 그 신부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답니다. 그리고 성체 분배 때 자신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후 성체를 받아 모신 신자들. 때론 아무런 대답 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아멘’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신 분. 실제로 ‘아멘’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타갈로그어로 뭐라 뭐라 말을 했던 아이들…. 그게 진짜 자신의 이름을 말했던 것 같은 그 모습들이 생각났답니다.

“아…, 신부님, 정말 창피해서 어쩌지!”

미사 후 두 신부님은 필리핀 신자들과 인사하는데, 몇몇 분들은 보좌 신부님을 보며 미소를 짓더니, ‘파더, 아농 빵알란 모?’하더랍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신부님과 얼마나 웃었던지! 그러면서도 무슨 말을 하든 성체를 바라보며, 주님의 몸을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받아 모시는 신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잔잔한 감동 또한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