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입력일 2019-04-02 수정일 2019-04-02 발행일 2019-04-07 제 313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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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제1독서 (이사 43,16-21)  제2독서 (필리 3,81-14)  복음 (요한 8,1-11)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라는 스님이 불상을 태운 일화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당나라 시기 유명한 고승인 단하천연(丹霞天然)이 낙양 동편에 있는 혜림사에서 하룻밤 묵을 때 벌어진 일이다. 때는 겨울이고 눈까지 내려 추위에 떨던 단하는 결국 불당의 목불(木佛)을 쪼개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것으로 언 몸을 녹이며 날을 새웠다.

다음날 사찰 전체에 난리가 났다. 성스러운 불상을 태워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절의 주지가 단하에게 왜 불상을 태웠냐고 따져 물었다. 단하는 천연덕스럽게 이 절의 불상이 유명하다 하니 부처님의 ‘사리’를 얻을까 해서 태웠다는 것이다. 목불에서 사리가 나올 리는 없는 법, 주지는 나무 불상에 어찌 사리가 있겠느냐며 화를 냈다.

이에 단하는 “사리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나무토막”일 뿐이라며 오히려 주지를 힐난했다. 나무토막에 불과한 불상이 추위에 떠는 중생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한 사람, 오늘 독서에서의 바오로다.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그는 그리스도를 지켰고 나머지는 버렸다. 심지어 그 나머지를 ‘쓰레기’라고 여길 정도로 선택의 동기가 분명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하느님의 의로움’이다. 바오로가 지킨 것은 그가 버린 것을 통해 얻게 될 선물이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분명했던 바오로는 지나간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 올 일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열성적인 전도는 모두 이것에 근거한다. 한 가지를 지키려면 그와 반대된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지키려 하는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율법을 버리지 못한다. 그 과거가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안정감 때문인데 그들이 버리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 여인을 사지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대에 세웠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세밀하게 다듬어진 율법은 어느새 그것이 보호해야 할 사람을 삼켜버렸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빈껍데기인 자기 자신이다. 바오로가 쓰레기로 여긴 그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느님의 새로운 약속, 즉 신약(新約)의 중심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연민이 자리하고 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버렸다면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버리신다. 이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만이 남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구약(舊約)이 계약과 그에 대한 인간의 충실함을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의 의로움’이 주요한 문제였다면 이제 신약에서는 나의 충실함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모든 것을 위로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광야에서 샘이 솟고 사막에 강물이 넘실거리는(이사 43,20) 것과 같이 믿기지 않는 구원의 잔치이다. 바오로는 그것을 깊이 이해했고 그래서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간음한 여인과 그리스도’.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약속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적발된 여인을 끌고 와 처분을 강요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간음죄에서 남자들이 빠져 있다는 당시의 율법도 못마땅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는 소위 지식인들의 행태가 불편하다. 예수님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끌려온 여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셨을 뿐 아니라 율법은 지키면서도 사람은 버리는 식자층의 어리석음도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그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딴청을 피우신다. 그들이 계속 대답을 청하자 예수님은 역정을 내지도 그들을 나무라지도 않으시면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로 이 사건의 선택을 군중에게 맡겨버리신다. 나이 든 자들부터 하나 둘 떠나가더니 결국 그 여인만이 남는다. 여인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구원된 것은 그 여인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또 한 여인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리를 떠난 그들도 동시에 구원됐다고 말할 수 있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혼동했던 교회의 과거를 우리는 기억한다. 중세의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지켰음에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벽을 더 높이 쌓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그때만 있던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면 교회를 위해서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멋진 성전을 짓는 일도, 교회의 교리를 수호하는 일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우선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들이 버려져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교회에 남겨주신 유일한 유언이기 때문이다.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불상을 애지중지하는 것보다 그것을 태워 추위에 떠는 중생을 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불심이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선택하시려고 당신을 버리신 시간이다. 그런 예수님께 하느님은 놀라운 일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버리셨던 그것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 주신 것이다. 죽음을 통한 부활의 신비이며 버림을 통한 얻음의 역설이다. 우리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버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지 않기를 희망한다. 재산을 쌓아둔 부자가 바로 그날 밤 불려갈 것이라는 복음말씀(루카 12,16-21)이 떠오른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