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신부님과 함께 떠난 우리들의 해외성지순례

김윤구(미카엘·대전교구 당진본당 돌마루공소)
입력일 2019-04-02 수정일 2019-04-02 발행일 2019-04-07 제 313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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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당진본당 돌마루공소 신자들이 마카오 성바울성당 유적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전교구 당진본당 돌마루공소(전담 신동준 신부)는 1996년 11월에 축성되어 23년이 지났고, 2018년 4월 처음으로 전담사제가 부임하면서 준성당 공동체로 승격됐다. 경당 안에 성체불이 켜지면서 전교가 활성화되고 신자수도 많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담 신신부가 김대건 신부의 신앙 못자리였던 마카오 성지순례를 제안하셨고 28명 교우들과 2박3일간 다녀올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 일행은 성모상 앞에 모여 기도하고 강복을 받고 버스에 올라 인천공항으로 이동했다.

순례 첫날, 김대건 신부가 15세에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건너가 매일 미사를 봉헌했다는 성 안토니오성당에서 우리 역시 미사를 봉헌했다. 지금은 이곳에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가 수학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조선신학교 건물터인 카모에스 공원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마카오 내전이 있을 때 잠시 머무셨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을 견학하고, 이튿날에는 카르멜 성모성당에서 두 번째 미사를 봉헌했다. 1602~1640년에 지어졌으나 1835년에 훼손된 성바울성당의 유적지 앞에서 기념촬영도 했다. 이날 비가 많이 내린 관계로 우산을 쓰고 옷을 적셔가며 순례길을 걸었는데, 일행들은 한층 추억이 될 것이라며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어 성수를 뿌려주신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김대건 신부는 1836년 마카오로 사제 수업을 떠나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고 이 땅의 첫 사제로 고국에 첫발을 디디셨다. 김 신부는 한민족이었기에 외국 주교나 사제보다 월등하게 전교활동을 펴실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846년, 김대건 신부는 최양업의 입국을 위해 주교님의 편지와 연락문, 해로로 입국할 때 사용할 지도 등을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 전달하고 오다가 체포됐다. 이후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된 후 사형을 언도받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시기까지의 역경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순교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다짐했다.

김윤구(미카엘·대전교구 당진본당 돌마루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