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밥이 되어 가신 분, 빛이 되어 오시네 / 이충우

이충우(안드레아)시인
입력일 2019-04-02 수정일 2019-04-02 발행일 2019-04-07 제 313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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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음성을 또렷하게 들었던 것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결식을 중계하는 TV 방송에서였다. 당시 방송에서는 종교계 수장 몇 분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다. 김 추기경도 ‘인간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내게는 감동적으로 울려 왔다.

김 추기경을 처음으로 가까이 뵌 건 일간 신문사에서 근무할 때였다. 나는 일간 신문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감사패’를 받았다. 그때 감사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80년 가을 한국일보 문화면에 ‘한국의 성지’를 취재 연재하였는 바 그 내용이 한국 천주교 전래의 역사를 빛냈으며 이 땅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삼가 귀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김 추기경은 감사패를 수여하시면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고, “교회 역사를 어떻게 이렇게 소상히 알고 썼느냐”고 격려 말씀도 건네셨다.

부끄럽게도 실은 이전까지는 몰랐다. 기사를 쓰기 전까지 한국 역사에 그리스도교의 전래사가 녹아 있고, 세계의 복음 전파 역사에 유례없는 순교 사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만 근세 문화사의 한 측면을 현장 중심으로 썼을 뿐이었다.

그때 교회사를 탐구하면서 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소통자’ 예수에 대해 신비감과 인간미를 느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말이나 글이 달라도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도 크게 매료됐다.

매스컴 종사자로 활동하면서 내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었다.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기사를 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단순히 기사를 쓰면서 얻게 되는 ‘저널리즘적인 성취’와는 달랐다.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기사를 쓰면서 ‘존재론적인 성취’를 이루고 느낄 수 있었다.

‘와서 보시오’라는 표어를 내걸었던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가톨릭 신자를 많이 증가시키는 계기였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도 신자 수를 증가시켰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에서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주례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이 치러졌다. 아무나 볼 수 없는 감격의 무대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열렸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의 두 번째 방한’이라는 경사를 만끽했다.

가톨릭 언론인들은 피정 때면 김 추기경을 모시고 대화 시간을 가졌다. 한 번은 추기경께서 사제가 되신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머니가 형에게 신부가 되라고 말씀하신 까닭에 이제 나는 장가들 수 있나 보다 하고 좋아했는데 그만 나까지…”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좌중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래도 내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간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때 김 추기경의 강론 제목은 ‘밥이 돼라’였다. ‘밥이 된다’는 말은 ‘내가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한다는 정신과 행동’을 뜻한다. 돌이켜 보니 김 추기경은 ‘순교’에 대해 강론하셨던 셈이다. 김 추기경은 그 강론처럼 평생 남을 먼저 배려하고 이웃을 위해 내 몸을 바치는 애타(愛他)의 삶을 살다 가셨다.

이제 우리 신자들도 당신께서 환히 밝혀 주신 빛을 따라 밥이 돼 살아가는 일이 남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충우(안드레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