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마르코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4-02 수정일 2019-04-03 발행일 2019-04-07 제 313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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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가르침 따라 복음서 저술 
분당성마르코·안산성마르코 주보
복음사가 4명 중 가장 먼저 집필
이교도에 의해 순교했다 전해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의 ‘성 마르코 복음사가’.

‘복음’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사용했을까? 우리가 복음사가라고 부르는 4명의 복음사가 중 ‘복음’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로 마르코 성인이다. 4개의 복음서 중 마르코 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을 뿐 아니라 성인은 복음서 시작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고 썼다.

복음서에서 늘 접하는 이름이지만, 사실 성인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복음서를 집필했기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성인은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성인의 행적은 성경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성인은 성경에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12. 25)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바르나바 성인의 사촌이며(콜로 4,10),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이다.

성인은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수행하며 안티오키아로 갔고(사도 12,25), 바오로의 제1차 선교여행에도 함께했다.(사도 13,5) 그러나 팜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사도 13,13)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으로 그의 제2차 선교여행에는 함께하지 않았지만(사도 15,36-40), 로마에서 바오로가 투옥됐을 때는 그와 함께 갇혀 있었다.(콜로 4,10) 베드로 사도가 성인을 “나의 아들 마르코”(1베드 5,13)라고 칭한 것에서 성인은 베드로가 친애하는 제자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성인은 60~70년경 4명의 복음사가 중 처음으로 복음서를 기술했는데, 베드로의 제자였던 만큼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복음서를 저술했다. 특별히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을 위해 로마에서 복음을 적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성인의 행적은 공식적인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전승으로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주교였다. 성인은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던 중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았고, 목에 밧줄이 걸린 채로 거리로 끌려 다니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교도들이 성인의 시신을 태우려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고, 그 틈에 신자들이 성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9세기 베네치아 상인들이 성인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겼고, 이를 기념해 성 마르코 대성당을 짓고 성인의 유해를 모셨다. 베네치아에서 성인은 특별한 공경을 받았고, 베네치아 곳곳에서 마르코복음서를 상징하는 사자상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베네치아 상인들은 긴 여행을 떠나면서 성인에게 무사안일을 기원했고, 돌아와서도 안전한 여행과 도시의 번영을 이룩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성미술에서 성인은 복음서를 들고 있거나 사자와 함께 등장하곤 한다. 또 베드로나 천사, 성령의 도움을 받아 복음서를 쓰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제2대리구 분당성마르코본당과 안산성마르코본당이 성인을 주보로 현양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