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기쁜 파스카 축제를!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입력일 2019-03-26 수정일 2019-03-27 발행일 2019-03-31 제 313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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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제2독서 (2코린 5,17-21)  복음 (루카 15,1-3.11ㄴ-32)

은혜로운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의 입당송은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화답송도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시편 34,9)라고 노래합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사제의 제의 색깔도 장밋빛입니다.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굳센 믿음과 정성을 다하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민족마다 고유한 명절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파스카 축제(과월절 또는 해방절)가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400년 동안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와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에서 그들은 매년 어린 양과 누룩 없는 빵을 먹으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파스카 신비를 되새깁니다. 파스카란 ‘지나가다’ ‘넘어가다’ ‘건너가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예리코 벌판의 ‘길갈’(Gilgal)에 진을 치고 처음 갖는 파스카 축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종살이하던 수치를 지워버리십니다.(여호 5,10) 어원 학자에 따르면 ‘길갈’은 히브리어로 ‘내가 지워버렸다’는 의미랍니다. 축제를 지난 다음날 그 땅의 소출을 먹으니 하늘의 양식인 ‘만나’가 그칩니다.(여호 5,12) 그들은 그때를 한해의 첫 달(니산, Nisan)로 삼는데, 홍해 바다를 건넌 때(탈출 12장 파스카축제, 3월~4월)와 같은 시기입니다.

제2독서(2코린 5,17-21)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활동하시며 새 질서를 이루심을 밝힙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이제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파스카의 어린 양처럼 십자가상에서 전 인류를 위한 구원과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고 친교의 일치를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절(5,20)로 일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바오로에게 부여한 사명도 넓은 의미에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직분입니다.

마태오와 루카 두 복음사가는 ‘되찾은 양의 비유’(마태 18,12-14; 루카 15,3-7)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는 루카만이 전합니다. 그는 ‘되찾은 은전’(루카 15,8-10)도 추가합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이들에게 애정을 갖고 계시고, 회개하는 죄인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루카 15,7. 10)

지중해 지역의 문화적 특성에 비추어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 상속을 요구하거나 재산을 남에게 넘겨주는 것은 금기사항입니다.(1열왕 21,3; 집회 33,20)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듯이 참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훈계하지도 않고 그 몫을 나눠준다는 것은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팔마 일 조바네의 ‘방탕한 아들의 귀환’.

상속재산을 남에게 팔아넘기고 먼 고장으로 가 방종한 생활로 자기 재산을 낭비한 작은 아들의 모습은 마을 공동체마저 분노케 합니다. 그가 재산을 탕진할 즈음 기근이 들어 곤궁해집니다. 절망 속에 있던 그는 한 부유한 주민에게 매달려 돼지를 기릅니다. 유다인이 가장 천한 일인 돼지치기를 한다는 건 모두가 놀랄 일입니다. 굶주리다 못해 돼지사료에 불과한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 했지만 아무도 주지 않습니다. 그 열매는 영양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먹기도 역겨워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야생의 열매입니다.

상속재산을 받으면 부모를 모셔야 하지만 자기 자신조차도 돌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후회합니다. 이제 그가 살아남자면 하인들에게까지 일용할 양식이 많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라 결심합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와 인연을 끊고 모욕을 주더라도 부끄러움을 받아들일 각오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연민의 정을 느끼고 껴안으며 공개적으로 용서합니다. 마음 깊이 통회한 아들은 하느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가장 좋은 새 옷을 입히고, 신뢰의 표시로 손에 반지를 끼웁니다. 신발을 신겨준다는 것은 종이 아니라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공동체도 그를 용서해주고 받아들이게끔 청하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도덕적으로 동생보다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언행 또한 부끄럽기만 합니다. 아버지를 도와 잔치를 준비하기는커녕, 경어도 붙이지 않고, 공개적으로 화를 내고 모욕하는 언사입니다. 자신을 아들이 아닌 종에 비유하고, 자기에겐 염소 한 마리도 안 주던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는 편애를 비난하면서, 자기 동생이 창녀와 살았다며 날조까지 합니다. 큰 아들의 이런 모습과 태도에 비추어 그의 마음도 딴 곳에 가 있고 아버지가 현존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큰 아들과 늘 함께 있고 자기 것이 다 그의 것이라며 사랑으로 대합니다.

‘되찾은 아들이 비유’ 이야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는지요? 돈 중심의 물질문명 속에서 살아가며 일용할 양식이 넉넉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중심의 일에 집착하고 쾌락을 즐기는데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의 자비와 용서가 얼마나 크신지를 깨달으며 늘 함께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빛의 자녀답게 파스카 신비인 부활대축일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야겠습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