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31) 로봇 종교는 해답이 아니다 / 윌리엄 그림 신부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rn※윌리엄 그림 신부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입력일 2019-03-26 수정일 2019-03-27 발행일 2019-03-31 제 313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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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로봇 개발과 활용에서 세계를 선도한다. 산업 현장의 로봇뿐 아니라 호텔 직원, 애완동물, 종업원, 노인 돌봄 등 로봇은 다양한 곳에서 줄어드는 인구를 대체하고 있다.

급기야 교토시에 있는 사찰인 고다이지(高台寺)에는 설법하는 안드로이드 로봇이 등장했다. 불상 로봇은 키 195㎝, 무게 60㎏ 정도인데, 몸체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고 여성의 목소리를 내지만 어딘지 스타워즈 영화의 안드로이드 C3PO를 연상시킨다. 실리콘 소재로 만들어진 손과 얼굴은 인간을 닮았을 뿐 아니라, 연설 내용에 맞게 다양한 표정과 손짓도 보인다. ‘마인더’라는 이름의 이 로봇의 얼굴은 일본의 전통적인 관음상을 본떠 만들어졌다.

대중에게 처음 선보이는 기자 회견에서 마인더는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법요를 진행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이미 고해성사 앱이 있다. 우리도 곧 안드로이드 대주교를 보게 될 것인가? ‘살과 피로 된’ 인간들 때문에 교회가 최근 겪어 온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괜찮은 진전일지 모르겠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도 수세기 동안 마인더와 비슷한 여러 수단들을 사용해 왔지만, 우리가 지금 그 로봇에게 기대하는 만큼 그 결과 역시 빈약했다. 그 수단들은 전자기기는 아니었으나, “불상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불교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고 말한 고다이지 주지승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복음주의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에서도, 전도에 나서는 이들은 성경책을 나누어 준다. 가톨릭에서는 종종 교리서를 그렇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생명 없는 책이 마음과 정신을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간혹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은 없지만 움직일 줄 아는 로봇이 간혹 그럴 수 있듯이. 또 많은 이들은 설교와 강론, 강연이 청중의 회심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한다.

컴퓨터를 통해서 듣던, 인쇄되어 읽히던, 발화되던, 말이란 것은 아주 탁월한 재능을 지닌 누군가가 하지 않는 한 그렇게 큰 힘을 갖지 못한다. 나는 아무 활기 없는 설교들을 수없이 듣고서야 그런 재능은 아주 예외적인 것임을 알았다.

설교자나 고위 성직자나 교황들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한다면, 전선들과 본체와 전동기로 인간이 만들어 낸 고안물이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공 지능은 아직 불교의 자비나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모방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며, 아마 앞으로도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최근 교황청 생명학술원이 후원한 ‘로봇윤리: 인간, 기계, 건강’이라는 워크숍에서 아르헨티나 윤리정치학회 의장인 마리타 카발로는 “눈 맞춤이나 포옹은 로봇이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삶을 개선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인간적 접촉은 기계가 따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일본 시가 있다. “말하는 이는 고귀하나, 자기도 모르게 몸으로 말하는 이는 더욱 고귀하다. 인도하는 이는 고귀하나, 자기도 모르게 본보기로 인도하는 이는 더욱 고귀하다.”

행동이 말보다 더 웅변적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더 많은 말을 기대하지 않는다. 말은 이미 도서관과 문서들에 차고 넘친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행동으로 맺는 신앙의 열매이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을 먼저 체험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말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관계에 관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공적 얼굴인 교계와 성직자는 오늘날 하찮은 본보기로 전락했으며, 교회가 집안을 정돈하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진행형 사건이 아니라 역사가 될 때까지 한 세대 정도는 그런 채로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적’ 얼굴이 더 특별한 투신과 활력으로 선교 사명을 맡아야 한다.

다시 말해, 언제나 교회의 심장이었던 평신도가 복음화에 더욱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을 책임자로 여기는 수동적 태도의 족쇄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성직자의 허가나 인도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인도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더 어려운 두 번째 임무는 그리스도의 몸을 좀먹은 성직주의라는 병에 걸린 성직자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병을 고칠 유일한 방법은 사제 수의 감소이다.

그러니 우리는 로봇이 사제들을 대체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야 한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rn※윌리엄 그림 신부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