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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그리스도 폴의 강(江) / 김형태

김형태 (요한) 변호사
입력일 2019-03-26 수정일 2019-04-10 발행일 2019-03-31 제 3138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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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먼 나라에 힘센 젊은이가 살았습니다. 천하무적인 그는 힘겨루기 상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다가 한 은수자로부터 사람들을 등에 업어 강을 건네주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장사를 만날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오랜 세월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그만 어린애를 등에 업고 강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등에 업은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강 한가운데서 그만 꼬꾸라질 지경이 됐습니다.

어찌어찌 겨우 건너편 기슭에 이르러 “왜 이리도 무거우냐”며 아이를 내려놓자, 그 아이 하는 말이 “너는 하늘과 땅을 지은 이를 업었다” 하더랍니다. 그리고 받은 이름이 ‘그리스도 폴’, 그리스도를 나른 자입니다.

시인 구상(具常)은 이 전설을 모티브로 ‘그리스도 폴의 강’이라는 60여 편 연작시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폴!/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습니다… 당신처럼 그렇듯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시중을 들/ 지향도 정침도 못 가졌습니다./ 또한 나는 강에 나가서도/ 당신처럼 세상 일체를 끊어버리기는커녕/ 俗情(속정)의 밧줄에 칭칭 휘감겨 있어/ 꼭두각시모양 줄이 잡아당기는 대로/ 쪼르르, 쪼르르 되돌아서곤 합니다./ 그리스도 폴!/ 이런 내가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 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 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 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

오늘 아침, 다섯 살배기 외손자 녀석과 TV ‘뽀로로 유치원’을 보는 데 어떤 꼬마가 요가 동작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거였습니다. “야, 쟤 참 잘한다.” 칭찬을 하기가 무섭게 외손자 녀석이 “할아버지. 나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 겨우 유치원 다니는 너도, 젊은 시절 그리스도 폴 성인처럼 이제 힘자랑을 시작했구나. 나도 지난 세월 이런저런 힘자랑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똑똑하지, 내가 돈을 잘 벌지. 내가 좋은 일도 많이 하지….

그렇습니다. 좋은 일도 그 공을 나에게 돌리면 힘자랑일 터. 그래서 「화엄경」 ‘보현행원품’은 10가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마지막에 이 모든 선행의 공덕을 내가 아닌 중생에게 돌리라는 회향분(回向分)으로 끝을 맺습니다.

법대 신입생 시절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라틴 법언을 처음 접하고 가슴이 벅차 올랐더랬습니다. 그 뒤로 정의를 내세운 힘자랑을 해 온 지 수십 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의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게 예전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요즈음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 음악가들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불러오던 저 아름다운 동요며 가곡들의 작사, 작곡가들이 죄다 친일파랍니다. ‘따오기’, ‘고향의 봄’, ‘오빠 생각’, ‘반달’, ‘고향 생각’, ‘봉선화’, ‘그 집 앞’ 등등. 심지어 ‘애국가’며 여러 학교 교가들도 다 바꾸자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그렇지요. 남존여비, 구타, 집단주의 같은 친일 문화와 제도, 관습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 권력을 유지하려고 ‘반민 특위’를 해산한 건 두고두고 우리 역사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습니다. 분명 정의가 아닌 거지요. 하지만 노랫말이나 선율 자체가 친일이 아닌 바에야, 그걸 작사, 작곡한 이의 친일행적을 들어 그 노래들까지 탓하는 게 과연 정의인가 싶습니다. ‘정의’가 ‘미움’으로 치달으면 그건 그저 힘자랑일 뿐이겠지요.

요즈음 <莊子>(장자)에 푹 빠져 지냅니다.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至人無己(지인무기) 최고 경지에 도달한 이는 ‘나’란 게 없고, 神人無功(신인무공) 신의 경지에 이른 이는 제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聖人無名(성인무명) 성인은 제 이름을 내세우지 않느니라.”

힘이 장사인 그리스도 폴 성인은 평생 그저 묵묵히 사람들을 등에 업어 강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 사랑의 화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 (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