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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고진감래(苦盡甘來) / 현재봉 신부

현재봉 신부rn(제2대리구 목감본당 주임)
입력일 2019-03-26 수정일 2019-03-26 발행일 2019-03-31 제 313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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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과수농사를 짓는 농부이시다. 여러 작물 중 감나무를 무척 아끼신다. 퇴비도 주고 가지치기도 하고 나무가 힘들어 보이면 막걸리도 몇 말씩 부어준다. 가지를 정리하다가 낙상하시길 여러 번. 위험을 마다하고 감나무에 또 오르신다.

그렇게 집착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바로 자식들을 위해 애지중지 농사지은 걸 보내주기 위함이다. 홍시도 만들고 감식초도 만들지만 그중 으뜸은 곶감이다. 최근엔 쪽감을 만들어 보낸다. 여름엔 어머니가 미리 갈무리해 놓은 냉동홍시를 별미로 먹는다. 아이스크림 저리가라다.

부모님은 젊은 시절부터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커 가고 돈 될 것이 별로 없던 농촌을 뒤로하고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왔다. 그렇게 힘들게 자식들 다 키워놓고 황혼이 되어서야 다시 시골을 찾았다. 어머니 왈 농사일은 잡초제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초제 등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유기농을 하기에 수 십 번의 풀 제거는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엔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뭔 생고생이냐’며 핀잔까지 들었지만, 지금은 동네 분들이 우리 밭에 와서 나물을 뜯어 간다. 땅을 살리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퇴비를 주고 잡초를 일일이 뽑아야 하는 등 사람의 엄청난 수고가 뒤따른다. 고생 끝에 건강한 먹거리가 생겨난다. 거저 얻어지는 것이라곤 없다.

얼마 전엔 밭 가는 농기계를 신청했다가 취소하고 말았다. 귀농 후 10년간 오로지 인력으로만 농사짓는 아버지의 고지식함에 할 말을 잃고 만다. 밭을 일구느라 허리까지 휜 부모님이 안쓰럽기만 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농사지은 건강한 먹거리로 행복해하는 자식들과 지인들을 생각하며 손에서 닳아빠진 호미를 놓지 않는 모습을 뵈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부모님의 우직함에 ‘고진감래’란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쓴맛 뒤에 단맛’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동서고금의 희망사항이다.

재계(齋戒)의 사순 시기 뒤에 부활의 기쁨이 찾아오지 않는가? 오늘 우리 모두 사순의 한복판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차려주신 잔칫상을 받고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길 바란다. 20세기 격동의 쓴 시기를 거쳐 온 우리나라는 2018년 말 선진국 진입의 척도인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고, 달디 단 열매를 먹게 됐다. 그러나 고진감래란 말이 무색하게 우리는 지독한 양극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양식과 물이 없어서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아니다. 나눔과 배려가 부족해서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배우자. 절망에 빠지고, 실패하고, 배고픈 이들도 아무 차별 없이 용서해주고 받아주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본받아 살 때, 우리는 양극화 시대를 극복하고 고진감래의 기쁨을 누구나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현재봉 신부rn(제2대리구 목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