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위 ‘이벽과 동료 132위’ 시복 현장 조사

박민규 pmink@catimes.kr, rn사진 성슬기
입력일 2019-03-19 수정일 2019-03-19 발행일 2019-03-24 제 3137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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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일치된 믿음’ 보여준 초기 한국교회 순교자들 
김범우·이벽 집터와 좌포도청 터 등 종로 일대 도보순례하며 기도
광희문 밖·새남터 등도 조사
‘하느님의 종’ 공적 경배 없음 확인
133위 중 51위 현장 조사 마쳐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1754~1785)은 한국천주교회의 초석이자 초기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인물이다. 이벽은 이승훈(베드로·1756~1801)을 베이징에서 세례받게 했으며, 그 역시 1784년 겨울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 내 최초의 천주교 세례식으로서 이벽의 집은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 세례식이 집전된 역사적 장소다. 이벽뿐만 아니라 함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32위는 초기 한국교회 안에서 고유한 믿음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이하 시복시성특위)와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는 3월 18~19일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이하 이벽과 동료 132위) 시복 서울대교구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 시복 법정 제13회기 개정

시복 법정 제13회기는 3월 18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 교구청 신관 3층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시복시성특위 위원장 유흥식 주교(재판관), 서울대교구 유경촌·정순택 보좌주교, 시복 재판진 박동균 신부(재판관 대리), 최인각 신부(검찰관), 김종강 신부(청원인), 연숙진(아녜스) 공증관, 서울대교구 관계자로 홍근표 신부(교구 사무처장), 조한건 신부(현장 조사 교구담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정했다.

이벽과 동료 132위 현장 조사는 하느님의 종의 ‘공적 경배 없음’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서 132위 중 51위의 탄생지와 활동지, 순교지 등 현장 방문 조사가 이뤄졌다.

시복 법정 제13회기 개정식에 현장 조사 담당자로 참석한 조한건 신부는 “현장 조사를 위한 사전 자료를 충실하게 수집했으며, 공적 경배 없음을 선언하기 위한 조사와, 거짓과 은폐 없이 현장 확인에 임할 것”을 서약했다.

유흥식 주교는 시복 법정 개정식 인사말에서 “오늘 현장 조사는 한국교회 초기에 목숨까지 바치신 51위 하느님의 종 순교자들을 만나는 은혜로운 시간이다”며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의 모든 해답도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들이 보여준 삶과 일치된 믿음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103위 순교성인과 윤지충과 동료 123위 순교복자가 탄생했음에도 한국교회 초창기에 순교하셨던 분들이 시복시성에서 빠져 있어서 늘 마음이 아팠다”며 “이런 의미에서 초기 한국교회사를 돌아볼 수 있는 현장 조사를 하게 돼 매우 기쁘고 감사하다”고 밝혔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맨 오른쪽)를 비롯해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재판진과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이 3월 18일 서울 돈화문로 좌포도청 터를 둘러보고 있다.

조한건 신부가 3월 18일 서울대교구청 회의실에서 열린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법정 개정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유흥식 주교(가운데)를 비롯한 시복 재판진과 서울대교구 관계자들이 3월 18일 서울 우정국로 양제궁 터를 둘러본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순교자들의 믿음을 따라서

이번 시복 현장 조사의 첫째 날인 3월 18일은 도보순례 형식으로 진행됐다. 종로 일대를 걸어서 순례하며 순교자들의 신앙 발자취를 따랐다. 가장 먼저 한국의 첫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범우(토마스·1751~1786)의 집터를 방문해 조사했다. 이어서 수표교에 위치한 이벽의 집터로 이동했다. 1754년 포천 화현리에서 출생한 이벽은 김범우와 함께 관헌에 발각돼 가정(家庭)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유흥식 주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본받자”며 재판진들과 함께 주모경을 바쳤다.

주모경을 바친 후 좌포도청 터로 향했다. 포도청은 조선시대의 치안 기관으로서 미결수일 경우 좌포도청에 머물렀다. 포도청으로 잡혀 온 신자들은 배교를 권유받았고, 이를 거부한 신자들이 좌포도청에서 대거 순교했다.

포도청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고 있는 종로성당의 현양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홍근표 신부는 “기록만으로 400명이지만 실제로 이름 없는 순교자까지 합하면 800명은 된다”며 “순교자들 각자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가장 고통스런 순교가 오랜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는 것”이라며 “이름 없이 순교한 평신도 순교자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흥식 주교도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자주 언급한다”며 “이름 없이 순교한 수많은 평신도들을 기억하며 기도드리자”고 말했다.

이어 양반 윤리에 관한 범죄를 담당하던 의금부 터를 방문해 조사했다. 홍근표 신부는 “조선시대 당시 양반과 여성의 옷을 벗기고 때리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었다”며 “하지만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양반과 여성에게도 모진 박해를 가했다”고 밝혔다. 이에 유 주교는 “신앙 선조들이 죽기까지 믿음을 지킨 것을 보면 폭력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응답했다.

박해시기 때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됐던 전옥서 터에 대해 조한건 신부는 “1900년도 사진에 전옥서가 나오는데 종교자유 시대 이후에도 이름 모를 많은 신자들의 옥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우포도청 터를 방문해 공적 경배가 없음을 확인했다.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순교한 성 유대철 베드로(1826~1839)가 있다.

재판진은 조선시대 법무부와 검찰의 역할을 하며 재판절차를 관할하던 형조 터로 이동해 조사를 하고 주모경을 바쳤다. 이어 현장 조사 첫째 날의 마지막 장소인 양제궁 터로 이동했다. 양제궁 터는 신유박해 때 송 마리아(1753~1801)가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곳이며, 이 일이 발각돼 송 마리아는 순교했다.

현장 조사 둘째 날에는 광희문 밖과 새남터, 양화진 터, 중림동약현성당, 서소문 역사공원 순교성지, 주교좌명동대성당 지하묘역을 현장 조사했다.

광희문 밖 순교성지 순교자현양관은 포도청과 의금부, 전옥서에서 순교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794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공간이다. 성인 20위, 복자 5위, 하느님의 종 25위가 포함돼 있다.

재판진은 11명의 성직자가 순교한 새남터 현장을 조사했다. 경기도 양평의 양반 집안에서 출생한 김면호(토마스·1820~1866)는 다블뤼 신부(훗날 주교)의 복사로도 봉사했고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어서 하느님의 종 13위가 순교한 양화진 터 현장과 중림동약현성당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방문해 공적 경배가 없음을 확인했다. 한국교회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이 순교한 서소문 밖으로 이동해 현장을 조사했다. 재판진은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에메렌시아(1801~1839)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명동대성당 지하묘역 방문을 끝으로 이벽과 동료 132위 중 51위와 관련된 현장 조사를 마쳤다.

박민규 pmink@catimes.kr, rn사진 성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