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3-19 수정일 2019-03-19 발행일 2019-03-24 제 313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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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입’이라 불린 명강론가
의왕본당의 주보 성인
명강론으로 신자들에게 인기
교회 쇄신·구호사업에도 앞장

사도 바오로의 편지를 설명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거의 700여 편에 이를 만큼 신약과 구약에 관한 설교를 남겼던 그는 특히 바오로 서간집을 애독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금구라고도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경에 활동한 교회의 학자이자 교부다.

성인의 이름으로 불리는 크리소스토모(Χρυσοστομοs)는 ‘황금’을 뜻하는 크리소스(Χρυσοs)와 ‘입’을 뜻하는 스토마(στομa)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말로 ‘금구’(金口)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이름은 말을 잘하는 사람, 곧 연설가 또는 웅변가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흔히 사용되던 이름이다. 성인은 초대교회의 주교이자 신학자로서 별호에 걸맞게 강론을 매우 잘했다고 전해질 뿐 아니라, 빼어난 저서들을 많이 남겼다.

성인이 처음부터 성직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성인은 젊은 시절 세 속적 출세를 위해 수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가득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성경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성인은 그때부터 당시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신학, 성서주석학, 법학, 철학 등을 배웠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리티우스 주교가 성인에게 독서직을 주고 곁에서 일하게 했지만, 평소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성인은 광야를 향했다. 성인은 4년 동안 은수자의 지도를 받고 또 동굴에 들어가 2년 동안 고행과 성경을 읽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쳤고, 모친의 간청으로 결국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성인은 386년 사제품을 받고 12년 간 설교사제로 활동했다. 성인은 신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수많은 명강론을 펼쳤다. 390년부터는 신약성경에 관해 연속으로 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때 ‘크리소스토모’라는 별명이 붙었다.

명성이 자자해지자 성인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됐다. 주교가 된 성인은 교회 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질책하고 교회 쇄신에 앞장섰다. 신자들에게도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하도록 가르쳤다. 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구호사업을 진행했다. 그러자 성인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고위성직자들이 성인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적대자들은 근거 없는 비난으로 성인을 고발했다. 결국 403년 성인은 면직 후 유배생활을 하게 됐다.

신자들은 성인의 유배에 반발했다. 첫 유배에 신자들은 성인의 유배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 잠시 유배를 취소시켰다. 404년 성인이 다시 유배되자 성인을 만나기 위해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됐다. 이에 황제가 성인을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자 성인은 새 유배지로 가던 중 선종하고 말았다.

성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은 412년 성인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성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성가대 경당에 안치됐다. 1568년 성 비오 5세 교황은 성인을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선포했다. 교구 내 본당 중에는 제2대리구 의왕본당이 성인을 주보로 삼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