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아주 특별했던 아름다움의 기억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입력일 2019-03-12 수정일 2019-03-12 발행일 2019-03-17 제 313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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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 15,5-12, 17-18)  제2독서 (필리 3,20-4,1)  복음 (루카 9,28ㄴ-36)

무수한 의심과 의혹, 망설임과 절망은 두려움 때문에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그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온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그들의 사랑을 더 완전한 것으로 하기 위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에 초대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수난과 죽음에 앞서 그분의 가장 본래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간직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인데 이 경이로움의 순간에 오히려 그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루카 9,34 참조) 모든 영광과 수난, 아름다움과 두려움은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다른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사실 그분의 수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이는 수난이야말로 진정한 영광에로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암시합니다. 언뜻, 스치듯, 보거나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가 되는게 아니듯, 제자들은 잠시 보았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힘’으로 삼아 수난과 죽음의 어둠을 견뎌냅니다. 아무리 혼란과 절망, 부당함과 부조리한 비극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을 기억하는 것, 환멸과 고통이 우리의 믿음을 훼손시키지 않게 단단한 마음을 가지는 것, 우리가 그분처럼 영광스럽게 변모되기 위한 길입니다.

■ 복음의 맥락

교회력은 가·나·다해로 진행되며 해당 시기마다 각기 다른 본문들을 읽게 되지만, 사순 제2주일에는 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읽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던 그분의 신적 초월성과 거룩함을 장엄히 선포하는 내용으로서,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해 사순 2주일에는 루카 9,28-36이 봉독되는데, 루카복음서에서 이 부분은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9,22 이하)와 예수님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내용(9,23-27) 다음에 등장하고, 이는 이제 곧 시작될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이 하느님의 거룩한 계획 속에 있는 사건임을 인식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루벤스의 ‘그리스도의 변모’.

■ 영광에 싸여

루카복음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다른 복음서들과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이 함께 나눈 대화의 내용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9,31)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문장에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표현은 “그분의 엑서더스”(Exodus, 텐 엑소돈 아우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완성하실 일은 ‘예수님의 엑서더스’(출애굽 혹은 탈출, 해방)인 것이고, 이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여정 전체를 가리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대표하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들은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32절) 이 초월적 계시를 보게 되는데, 갑자기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34-35절) 들려옵니다. 이 특별한 현현(顯現)의 목적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 연기 뿜는 화덕과 횃불

수난과 영광의 밀접한 연관성은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람(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에게도 해당됩니다. 독서의 본문은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창세 15,5)시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데리고 나감’이 곧 엑서더스이고, 칼데아의 우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느님은 아브람을 자신의 거처에서, 곧 자신에게 안락한 익숙함에서 밖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분께로 가기 위해서는 늘 나오고 떠나는 여정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것이며, ‘밖으로 나온’ 아브람에게 이제 하느님의 선물과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5절) 마치 아브람에게 최상의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도 냉혹한 시험이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임을 잘 알고 있던 아브람에게 거대한 후손에 대한 약속은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를 믿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6절) “믿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만’(‘아멘’과 동일한 어근을 가짐)이며 이 말이 동사(히필형)로 사용될 때 ‘그렇게 생각하다’, ‘그렇게 확신하다’, ‘전적으로 의지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을 아브람은 진지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의지했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주시는데,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체다카’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모순과 불가능성에 휘둘리지 않고 그 관계를 항구히 유지하는 자세를 말하며 하느님은 아브람의 이러한 관계적 모범을 올바름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아브람이 불가능과 의심에 훼손되지 않고 당신을 굳게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은 이제 ‘약속’을 ‘계약’으로까지 발전시키십니다.(18절) ‘계약’(契約: 맺을 계, 묶을 약)은 서로의 관계가 묶여지는 약속을 말하며, 고대 근동의 계약은 제사가 동반되는 일종의 ‘예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물을 잘라 놓고(그래서 유다인들은 ‘계약을 맺는다’고 하지 않고 ‘계약을 자른다’[히브리어 카라트 베리트]고 함)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계약 내용을 선언했는데, 이는 계약을 어길 시 두 동강난 제물처럼 될 것임을 맹세하는 행위였습니다.(예레 34,18-20 참조) 하느님은 당시의 관습대로 제물을 가져오게 하시어 반으로 잘라두고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17절)로 등장하십니다. 특이한 점은 계약 당사자들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지 않고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로 나타나신 하느님만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계약 준수의 의무에 귀속되고, 아브람은 계약을 지키지 못할 경우 감당해야 할 비극에서 제외시키시는 듯한데, 이는 인간에게 그 어떤 저주나 손해, 피해도 주지 않으시고 오직 무상으로 당신의 사랑을 전해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도를, 되돌릴 수 없는 계약을 통해 선포하시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우리를 진심으로 감동케 하고 매료시킨 아름다움은, 인간이 감수해야 할 모든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인내하게 하는 가장 힘센 기억이며 능력이 됩니다. 그 아름다움이 경이롭고 충격적인 것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제자들과 아브람이 목격한 하느님 현존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불가능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강력한 촉매제이며, 지켜내야 할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혼란과 절망, 환멸과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내게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일을 지켜내는 것,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의 자세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후 조용하고 담담하게 수난을 기다리는 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 우리의 몸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제2독서, 필리 3,21) 조금씩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