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 칼럼] (30) 비오 12세 교황 비밀문서고 개방 / 존 알렌 주니어

존 알렌 주니어 (크럭스 편집장)rn※존 알렌 주니어는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입력일 2019-03-12 수정일 2019-03-12 발행일 2019-03-17 제 3136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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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오 12세 교황 재임기의 비밀문서고를 2020년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어떤 의미가 있든지 간에, 미리 내릴 수 있는 아주 분명한 결론은 하나다. 문서고 개방이 홀로코스트 중에 비오 12세 교황이 침묵했다는 설에 관한 역사적 논쟁을 해결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논쟁은 비오 12세 교황이 무엇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히틀러를 공공연히 비난했어야 했는가? 홀로코스트에 연루된 모든 이를 파문한다고 겁주었어야 했는가? 연합군에게 압력을 넣어 죽음의 수용소가 더 일찍 해방되게 했어야 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복잡한 환경에서 무엇이 최선의 결과를 낳았을 것인가에 관한 주관적 판단에 따른다. 용감한 이들에게 행운이 따랐을 수도 있고, 신중함이 용기보다 나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어느 쪽으로든 결론을 내려줄 ‘스모킹 건’은 누구의 문서고에도 없다.

게다가 비오 12세 교황에 관한 논쟁은 도덕 논쟁이다. 윤리학이나 논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존재’에서 ‘당위’를 도출할 수는 없다. 자기 입맛에 맞는 온갖 역사적 사실들을 끌어 모을 수는 있으나, 그 사실들이 비오 12세 교황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는 못한다.

‘비오 12세 교황과 홀로코스트’는 롤프 호흐후트의 희곡 「신의 대리자」가 출판되면서 비오 12세 교황이 유다인 대학살에 연루됐거나 적어도 침묵했다는 비난이 불붙기 시작한 1963년 이후 지금까지 추이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지겹도록 익숙한 주제이다.

그 전까지 비오 12세는 전쟁 동안 보여준 리더십으로 유다인 공동체까지 포함한 넓은 층에서 존경을 받았다. 예컨대, 1958년에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이렇게 썼다. “10년간의 나치 공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순교의 공포를 헤쳐 나가고 있을 때, 교황은 박해자들을 단죄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신의 대리자」 이후 비오 12세 교황의 기록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 더 힘이 실렸고, 이에 맞서 교황을 옹호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점점 더 격론으로 치달았다. ‘비오 전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은 최근 들어 주춤해지기는 했으나, 그동안 양측의 기본 정서가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자료가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교황청이 파격적으로 기록물에 접근을 허용한 바로 그 시기들에 비오 12세 교황에 관한 입장들이 더 굳어졌다는 역설에서도 알 수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전쟁 시기의 문서고를 공개하도록 명령하여 1964년에서 1981년까지 12권짜리 전집이 출판됐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4년에 전쟁 포로들에 관한 기록들을 추가로 공개하도록 승인했다.

이 모든 기록이 이미 공개되어 학문적으로 연구된 것을 감안할 때, 2020년에 정말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것이 등장할 것인가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프랑스인 교회사학자 필립 체노는 “특종을 기다리는 이들은 조금 실망할 것”이라며, 자료가 공개되어도 “비오 12세 교황과 전쟁 중 그의 태도를 해석하는 데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새로운 자료의 역사적 중요성이 덜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 다른 방면에서 흥미로울 것이라는 말이다. 체노가 지적하듯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는 연구자들에게는 오랫동안 일종의 ‘블랙홀’ 같은 시기였다. 전쟁 시기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준비기에 관한 연구는 넘쳐나는 반면, 그 중간기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미국인들이라면 당시 교황과 미국 교계의 관계, 특히 뉴욕대교구장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과의 밀접한 유대에 관해 새롭게 드러날 것들에 관심이 있을 법하다. 가령, 교황이 1944년에 스펠먼 추기경을 최초의 미국인 국무원장으로 임명하려는 제안을 추기경이 거절했을 때 비오 12세가 아쉬워했는지, 내심 다행으로 여겼는지 알게 된다면 아주 흥미롭지 않겠는가.

어찌됐든 비밀문서고 개방은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비오 12세 교황의 유산에 대한 논쟁을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논쟁을 끝내려면 기록물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개방이 필요한데, 정신과 마음을 열기란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존 알렌 주니어 (크럭스 편집장)rn※존 알렌 주니어는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