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멈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입력일 2019-03-05 수정일 2019-03-05 발행일 2019-03-10 제 3135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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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
제1독서 (신명 26ㅡ4-10)  제2독서 (로마 10,8-13)  복음 (루카 4,1-13)

‘安分知足’(안분지족).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지족(知足)에서 족(足)은 구(口)와 지(止)가 합쳐져서 생긴 글자다. 그래서 지족은 지지(知止), 즉 멈출 바를 아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만족은 탐욕과는 다르게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이 ‘멈춤’이다.

탐욕은 멈출 바를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여유가 없다. 탐욕은 인간이 갖기 쉬운 하나의 맹목이다. 맹목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탐욕 하는가를 물으면 특별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것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내연기관과 같다. 그러한 엔진은 연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탐욕 역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다면 멈추지 않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장자(莊子)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기심(機心), 즉 기계적 마음이라고 부른 것이나 유가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참다운 선(善)에 이르는 것의 시작으로 ‘멈출 바를 아는 것’(知止)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오늘 독서나 복음은 인간이 갈 수 있는 최대 지점이 결국 자신이 발(足) 붙이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각성시키는 듯 보인다. 멀리, 높게 우리의 이상을 설정하지만 그 긴 여정에서의 종착역은 결국 자신의 발 아래다. 되돌아옴이다. 특별히 사도 바오로는 오늘의 제2독서 부분에 해당되는 구절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또 말합니다. “‘누가 지하로 내려가리오?’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로마 10,6-7)

후앙 데 플랑데스의 ‘악마의 유혹’.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오늘 제2독서의 첫 구절이다.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로마 10,8)

믿음의 말씀은 저 하늘 높이 있거나 저 땅 깊숙한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복음의 말씀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대신 성취되거나 혹은 고원(高遠)한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성취되고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과 관계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가끔 평범한 일상과 매우 다른, 신묘한 체험이나 환영을 높은 신앙의 경지로 여길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물론 특별한 소명으로 인해 이러한 체험이 허락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가 사이비(似而非)인지 아닌지는 그들의 깨달음이나 신적 체험이 일상을 긍정하게 만드는지 부정하게 만드는지를 통해 가려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이비들은 멈춰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탐욕스럽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떠나 있던 지난날들, 다시 말해 자기의 분수를 망각하고 우쭐대던 과거를 반성하고 세상의 참된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回心)이라 부른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悔改)라고 부르는 말의 어원도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에 있다.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 그래서 신(神)적인 일의 시작은 탐욕이라는 기계적 맹목에서 멈추는 것(止)부터다.

명나라 때 일부 유학자들은 이 멈춤의 순간을 기(幾)라고 불렀다. 일종의 전환점이다. 그들은 이 기를 우주의 운행원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까지 칭송했다. 지나간 과거의 악습, 혹은 기계적 생활에서 마음을 내는 일이 바로 멈춤이다. 물론 이 멈춤은 멈춰 서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멈춤은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시작이고 그래서 첫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일궈 내는 값진 신앙의 삶은 회개해 돌아섰던 그때의 마음, 즉 첫 마음과 동일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덕담으로 자주 등장하는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결국에는 생각 없이 가던 길을 멈추자는 이야기며 회개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40일간의 수행을 마치고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다. 복음은 수행의 전 과정은 생략한 채 마지막 유혹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 유혹이 마지막에 있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최후를 의미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그것이 가장 끊기 어려운 유혹임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직면한 유혹은 말 그대로 유혹이다.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단순하게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은’ 일종의 멈추지 않는 충동을 보여 준다.

극도의 허기짐에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그 주안점이 허기를 채우는 것에 있지 않다. 거기에는 궁핍을 해결하는 것과는 무관한,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자리한다. 정말 배가 고프다면 수행을 마치고 가족들과 음식을 들면 그만이다. 세상을 모두 소유하도록 유혹하는 속삭임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다 얻은 다음 도착하려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것을 묻지 않는다면 그것을 다 소유한다 해도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상처를 입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질적 특성은 하느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데 있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것이다. 사실 참된 생명이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멈추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결국 예수님께 던져진 유혹들과 그것에 대한 극복은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일종의 멈춰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간의 극기와 절제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40일을 의미하는 사순절(四旬節)은 이스라엘의 광야체험과 예수님의 사막체험을 현재화하는 행위다. 이 두 체험은 결국 우리가 멈춰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멈출 줄 알아야 만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열심’을 가장해 제어하지 못했던 탐욕은 없었는지 잠시 숨을 돌리고 멈춰야 할 때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