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인천교구 안산 대부본당 선감공소 서창의(안나) 전 회장

정리·사진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19-02-25 수정일 2019-07-02 발행일 2019-03-03 제 313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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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 위해 순명한 삶… “주민들 기도에 큰 힘 얻어”
십여 년 몸 담았던 수도회 나와
서울 상계동 빈민촌에 들어가
전교회장과 교리교사 봉사하며
소외된 이들에게 복음 전해

1990년 선감공소로 거쳐 옮기며
공소회장 맡아 공동체에 활기 선사
신자와 주민들이 공적비 세울만큼
지역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 역할

‘소외된 이곳 낙후된 공소에서 서(안나)창의 회장님이 이곳에 오시어 자선과 봉사 그리고 자비를 드려 새로운 성전(공소)을 건립하시어 믿음 안의 벗(교우)에게는 빛과 소금이 되셨고 마을 노인들에게는 안식과 복지를 염려하시고 항상 심신을 다하여 선을 베풀어 주셨기에 성전 건립 10주년을 기하여 감사의 뜻과 길이 기억하기 위하여 비를 세워 드립니다.’

인천교구 안산 대부본당 선감공소 입구에 서 있는 서창의(안나·82) 전 선감공소 회장의 공적비(功績碑)에 새겨진 내용이다. 서창의 전 회장은 회장직을 내려놓은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회장님’으로 불리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서 전 회장은 13년간 수도생활을 한 후 퇴회하고 서울 상계동본당 관할 빈민촌에서 15년 이상 전교회장, 교리교사로 봉사했다. 이후 선감공소에 정착해 공소회장을 역임하며 허물어져 가던 선감공소를 다시 짓고, 현재까지 공소를 지키며 신자들, 지역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박힌 오늘날, 한 평생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온 서 전 회장을 만났다.

◎대담: 박지순 취재1팀장

◎날짜: 2019년 2월 22일

◎장소: 인천교구 안산 대부본당 선감공소

서창의 선감공소 전 회장은 13년간 수도생활 후 퇴회 해 서울 상계동본당 관할 빈민촌에서 15년 이상 전교회장, 교리교사로 봉사했다. 이후 선감공소에서 2004년까지 공소회장을 역임하며 허물어져 가던 선감공소를 다시 짓고, 현재까지 공소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박지순 취재1팀장(이하 박 팀장): 서창의 선감공소 전 회장님은 20~30대 13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신 후 세상으로 나와 50년 가까이 오직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최근에 암 투병을 오래 하신 것으로 아는데 건강은 어떠신지요?

▲서창의 전 회장(이하 서 회장): 발견 당시에는 심각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인천에 있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폐암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서울에 있는 큰 전문병원으로 가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병원에 가서 고생을 하는 것보다 혼자 고통을 받고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냥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2007년이었고 나이가 70세였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며 견디고 있었는데, 제가 몸 담았던 수녀회의 수녀들이 우연히 제 상황을 알게 됐습니다. 이후 수녀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룹을 이뤄 저를 방문해 음식도 가져다 주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해줬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 3년이 흘렀고 어느 순간 통증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 산다는 진단 후 12년이 지난 지금 저는 살아 있습니다. 제 몸이 완치됐다는 것을 느낍니다. 투병기를 겪으며 한 때 몸무게가 20㎏이나 빠졌기 때문에 몸에 힘은 없지만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폐암이 나은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수녀들은 선감공소를 지을 때도 많이 도와 줬고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저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박 팀장: 참 다행입니다. 서 회장님은 서울 상계동 빈민촌에서 세상에서의 봉사를 처음 시작하셨습니다. 상계동 빈민촌은 어떤 곳이고 왜 그곳으로 가시게 됐습니까?

▲서 회장: 1972년 말 수도회를 나와 건강이 안 좋아 1년 정도 요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3년 말 당시 조그만 초가집으로 지어진 서울 청담동공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 신부님이 오셔서 혹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저에게 무슨 느낌이 옵니까?”라고 물었고 신부님께서는 “그럼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단 두 마디가 오간 끝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974년 부활절에 9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너무나 행복했고 사명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워낙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청담동공소에서 교리교육을 하던 중 휴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1974년 겨울, 강원도 영월에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친구가 유치원 선생을 했습니다. 휴식 기간을 가질 겸 그곳으로 갔는데 떠나는 날 신부님이 저를 알아 봤습니다. 강릉 지역에서 본당 수녀로 있을 때의 저를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상계동에 친구 신부가 있는데 매우 열악한 곳이라 저에게 그곳으로 가서 도와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가기로 결정했고 1974년 성탄절을 지내고 상계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상계동은 이재민, 수재민 등이 모여 8명씩 판자촌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불편한 교통과 열악한 환경 때문에 교리교사들은 6개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두 그만뒀습니다. 상계동에서 15년을 있었습니다.

-박 팀장: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서 회장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살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왜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서 회장: 수도회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난하게 살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잘 몰랐지만 살아가다 보니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수도복이 아닌 평복으로 활동하는 성심수녀회 수녀들과 6년 동안 상계동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평복을 입고 활동하는 개방적인 모습과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는 모습들에서 공의회 정신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박 팀장: 1970~1980년대 상계동 빈민촌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상계동본당에서 전교회장과 교리교사로 일했던 짧지 않은 세월을 어떻게 자평하시는지요?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자신을 위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서 회장: 잃은 것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고 수녀원에서도 빈손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저에겐 너무나 큰 행복이었습니다. 15년 동안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계동본당 신자들이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으로 1998년 10년 만에 방문했는데 참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은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상계동본당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전화통화는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상계동본당 신자들은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함께 산 사람들의 고마워 하는 마음과 기도는 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박 팀장: 서울 상계동을 떠나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 자리한 선감공소로 1990년에 들어오셨습니다. 선감공소에 어떤 소명이 있어 오셨습니까?

▲서 회장: 상계동 빈민지역 생활이 육체적으로 받쳐주지 않아 교리교육을 하다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휴식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상계동에서 함께 일하던 신부님이 상계동이 개발돼 더 가난한 지역인 성남 상대원본당으로 갔고 신부님은 저에게 요양할 겸 함께 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1990년 여름 성남 상대원본당으로 가 노인 교리를 맡으면서 사무장도 도우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상계동에서 저에게 교리교육을 받은 부부가 선감도로 가서 살게 됐는데, 그분들이 제가 있는 성남까지 찾아와 선감도로 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부의 간곡한 부탁으로 선감도로 오게 됐습니다. 그 당시 선감공소는 작고 허물어져 가는 건물을 공소로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공소 건물을 다시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연히 문구회사 모닝글로리 회장 부부를 알게 됐는데 그분들의 물적 도움과 여러 은인들의 후원으로 공소 건축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모닝글로리 회장 부부는 개신교 신자지만 지금도 선감공소를 가끔 방문해 함께 미사도 드립니다.

선감공소 신자들이 14년간 공소를 위해 헌신한 서창의 전 공소회장에게 보답의 의미로 2004년 세운 공적비.

-박 팀장: 허물어져 가던 선감공소 건물을 1994년 새로 짓고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공소회장을 맡으셨습니다. 선감공소에서는 매주 오전 6시 신자 20~30명이 모여 주일미사를 드린다고 들었습니다. 서 회장님은 선감공소 공동체의 산 증인이신데 선감공소 신자들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설명해 주십시오.

▲서 회장: 제가 공소회장을 맡은 기간인 약 10년 동안은 매우 활기찼습니다. 이 작은 공소에서 레지오 단체가 3개나 있었습니다. 2004년부터는 몸이 아파 회장직을 넘기고 지금은 공소 주변 관리 정도를 하고 있습니다. 공소회장은 따로 있지만 주민들과 신자들은 저를 정신적 지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자 아닌 마을 주민들도 선감공소 공동체에 호의적인 편입니다.

-박 팀장: 선감도 주민들이 서 회장님도 모르는 사이에 공적비를 세운 사연이 궁금합니다.

▲서 회장: 저도 모르게 주민들이 세웠습니다. 알았으면 당연히 못하게 했을 겁니다. 2004년 12월 초 몸이 좋지 않아 공소회장을 그만두고 한 달간 충북에 있는 조카 집으로 요양을 갔습니다. 그 곳으로 선감공소 신자들이 찾아와 돌아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공소 신자들이 모여 공적비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2004년 11월에 글귀를 새기고 2005년 1월에 세웠습니다. 공소 신자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14년간 선감공소에서 고생을 한 저에게 보답의 의미로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공적비를 선물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박 팀장: 서 회장님은 평생 청빈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교회는 중산층화, 세속화돼 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서 회장: 저는 1957년 말 세례를 받고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방향 설정에는 무엇보다 성직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교회에서 성직자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성직자가 먼저 가난하게 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범을 보여 준다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가장 탁월한 길은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서창의 선감공소 전 회장이 본지 박지순 취재1팀장과 2월 22일 서 전 회장이 머무는 ‘신망애의 집’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선감공소 신자들이 1995년 공소를 방문한 당시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 끝이 서창의 선감공소 전 회장. 서창의 선감공소 전 회장 제공

정리·사진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