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다윗처럼, 다윗만큼, 다윗보다 더……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9-02-19 수정일 2019-02-19 발행일 2019-02-24 제 313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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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제1독서 (1사무 26,2. 7-9. 12-13. 22-23)  제2독서(1코린 15,45-49)  복음 (루카 6,27-38)

자랑 하나 할까요? 지난해, 저희 부산교구에서는 더 많은 교우분들께서 성경과 친해질 수 있도록 ‘말씀일기’를 발행하였습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성경을 읽은 후에 그날 말씀에 대한 묵상을 기록하도록 했는데요. 성경통독을 마친 후에 그 기록 본을 교구로 보내면 작은 선물을 주기로 했습니다. 꼬박 일 년, 성경을 통독한 기쁨을 함께 누리고 그 수고를 격려하려는 취지였지요. 올해, 저도 그 선물을 받을 겁니다. 매일매일 신자 분들과 함께 성경을 읽는다는 즐거움에 단 하루도 빼먹을 수가 없었는데요.

그렇게 하루하루 기록하다 보니 저도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기쁘고 신나는 마음으로 ‘말씀일기’를 교구청으로 보내며 많이 뿌듯했습니다. 성경도 읽고 상도 받으니…… 이야말로 “얼마나 적은 노력을 기울여 큰 안식을 얻게 되었는지”(집회 51,27) 고백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만하지요? 이런 기쁨, 이 신바람 나는 일을 더 많은 분들이 체험하시길 바라며, 소문냅니다.

성경이 전하는 다윗의 삶은 살펴 묵상할수록 놀라운데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다윗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던 모습이야말로 믿음인의 귀감이 되니까요.

다윗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원수에게는 자신의 피해만큼 되갚아주는 것이 ‘정의’였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지요. 그래서 더욱 주님과 다윗의 관계를 살피고 싶습니다. 죄 없는 자신을 오직 질투에 사로잡혀 맹렬히 뒤쫓고 있는 장인어른, 사울 왕을 대하는 모습에서 진심으로 하느님의 뜻에 우선하여 살았던 다윗의 단단한 믿음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솔직히 그날 다윗 왕이 사울에게 복수를 했더라도 세상은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비사이의 말처럼 그렇게 원수를 갚게 해 주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은혜라 여겨도 무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순간에 하느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온전히 맡겨드립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 용납되지 않는 상황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상황이 예전에도 벌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은데요. 오늘 사울 왕에게 나아가 다윗의 거처를 고자질했던 사람들이 예전에도 똑같은 짓거리를 했다는 점에 주목해 봅니다. 그들의 야비한 행동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치사하게 누군가를 고자질해서 덕을 보려는 심보가 괘씸한 겁니다.(24장 참조) 무엇보다 그들이 옳지 않은 못된 짓을 반복하는 사실이 아픈 겁니다. 따져보면 이런 경우가 우리에게도 비일비재하니까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거듭 또다시 거푸 반복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니까요.

사울의 창과 물병을 훔치는 다윗. 출처 Wellcome Images

어쩌면 아비사이의 간언을 듣는 다윗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지는 않았을까요? 치 떨리는 원수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이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까요?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한 번 살려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니 된 맛을 보여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스치지는 않았을까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게 원칙이며 정의로 여겨지던 세상이었으니 말입니다. 만약에 그날 다윗이 부하들의 뜻에 따랐다면, 복수심에 불타올라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뜻은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기 원칙에 사로잡혀 자기 고집을 주장하는 범인에 머물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끝내 그리스도의 조상이라는 영예를 놓쳤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아찔한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다윗의 강한 의지가 돋보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무게를 깊이 새기게 됩니다. 흔들림 없는 다윗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또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사울 왕을 죽이자는 건의를 단호히 물리치는 다윗을 보시며 우리 하느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시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하느님의 뜻을 기억했던 다윗의 믿음이 너무너무 탐납니다. 매 주일 말씀을 듣기에 주님께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주장에 묶이기 일쑤인 우리, 자신의 주장을 고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뜨끔한 경종이라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윗이 사울 왕을 대번에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또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때 다윗이 사울 왕의 옷자락만 자르고 물러났다고 전하는데요. 그런 후에 다윗은 왕의 옷자락을 잘랐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찔렸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마 그래서이겠지요. 다윗은 자기 양심에 찔렸던 행위를 이번에는 반복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옵니다. 다윗은 한 번 마음에 찔렸던 일, 한 번 회개했던 행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참된 회개를 살아냈던 것입니다.

솔직히 두 번이나 거푸 사울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으니 아비사이의 말처럼 ‘죽이는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치워낸 다윗, 오직 하느님의 정의에 의탁하며 선함을 선택했던 다윗…… 왜 다윗이 믿음과 참회의 모범이 되는지,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할 소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 소명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뽑아 주셨는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더해서 나의 온 삶이 하느님의 은혜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날 다윗의 의도에 사울의 목숨을 맡기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선택의 여지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의지에 적극적으로 도우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다윗이 사울을 개인적 원한 관계에 놓인 인물로 보지 않고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로 받아들였을 때,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에 빠져들게 해 주시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도우신 사실을 마음에 담습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의 뜻을 먼저 기억하고 우리 생각을 주님 쪽으로 기울여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우리의 길을 터주신다는 약속이니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대단한 사랑과 엄청난 용서를 요구하십니다. 다윗이 누리지 못했던 믿음의 특은을 입은 그리스도이기에 다윗보다 더, 큰 사랑을 살아내기를 소원하십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의 폭에 감동하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한 주간,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여유를 살기 바랍니다. 설사 나를 험담하는 껄끄러운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살기 바랍니다. 내게 손해를 끼치고 괴롭힌 ‘원수 같은’ 사람에게마저도 다윗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힘으로 주님과 이웃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