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성 이윤일 요한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2-19 수정일 2019-02-19 발행일 2019-02-24 제 313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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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두고도 기쁘게 신앙 증거
송전본당 주보성인
대구 관덕정서 참수로 순교

성 이윤일 요한 초상화.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나요.”

1866년 11월 18일 문경지역의 여우목. 포졸들의 질문에 점잖게 답하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어 위엄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바로 103위 성인 명단의 맨 마지막에서 만날 수 있는 이윤일 요한 성인이다.

제1대리구 송전본당의 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은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충천도 홍주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가정은 성인의 부친 대에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친가와 외가 모두 열심한 신자 가문이었다. 성인의 친척 중에는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성인 역시 이런 가풍을 이어받아 자기 본분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성인은 본래 성품이 순량해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성품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부친에 대한 효심도 지극해 비신자들조차도 성인을 위해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 말할 정도였다.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다는 소식에 포졸이 들이닥쳤지만, 성인은 포졸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태연히 포졸을 맞아들였다. 자신이 천주교를 믿는다고 당당하게 증언한 성인은 “이 마을 밖에도 천주교를 믿고 행하는 자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부정했다. 이때 성인의 집안사람 8명을 포함한 30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다.

포졸들은 성인의 목에 큰 칼을 씌우고 발을 쇠사슬로 묶었다. 3개월 동안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성인은 그때마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잡혀온 신자들 외에는 다른 동료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지는 고문 속에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성인은 모든 유혹을 한사코 거절했다.

성인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다른 신자들을 독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성인의 사형 명령이 떨어지자 성인은 크게 기뻐했다. 성인은 사형을 당하기 위해 대구로 출발하기 전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했다.

성인은 1867년 1월 21일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아먹고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가 참수로 순교했다. 성인의 후손들은 성인의 시신을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에 묻었다가 경기도 용인군 묵리로 이장했다. 이후 성인의 유해는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을 거쳐 1987년 대구 성모당에 안치됐다. 이후 성인은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이 됐으며, 1991년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됐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산 32-1에는 성인이 묻혔던 묘가 남아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