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행복과 불행의 완벽한 반전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n※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rn로마교황청립성
입력일 2019-02-12 수정일 2019-02-12 발행일 2019-02-17 제 313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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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제1독서 (예레 17,5-8) 제2독서 (1코린 15,12. 16-20_ 복음 (루카 6,17,20-26)

‘행복’은 불행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고, ‘불행’은 행복을 찾아가는 출발일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을 생각하지 않지만 불행 중에 있는 사람은 늘 행복을 갈망하고 궁금해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집착’이 삶을 지배하게 될 때 삶은 불행해지고, 참혹한 불행 속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실과 양심을 의연하게 지키는 이라면 이미 그는 행복의 빛 안에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맨얼굴은 이렇게 우리의 일반적 통념을 완벽하게 반전시키며 발생합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이며 불행인지, 그 본질적 개념을 명쾌한 반전 속에 가르쳐줍니다.

■ 복음의 맥락

‘행복선언’으로 잘 알려진 본문은, 모두 8개의 선언으로 되어있는 마태오복음 5장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 루카 6,17-26은 4개의 행복선언과 4개의 불행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행복과 불행을 정확히 4개씩 병치해둠으로써 보다 분명한 대조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언의 대상을 ‘3인칭’(그들)으로 설정한 마태오복음과 달리 루카는 ‘2인칭’(너희)으로 지정하고 있어서 수신인에 대한 보다 신랄하고 집중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현재 굶주리고 고통과 모함 속에 울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 가난이 주는 행복

행복과 불행에 대한 루카 6장의 내용은 당시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역발상적 파격을 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굶주리며-슬픔에 울고 있고-박해받는 이’(6,20-22 참조)가 오히려 축복받은 이로써 행복한 사람이고, ‘부유하고-배부르며-기쁨 속에-존경받는 이’(6,24-26 참조)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가난’에 해당하는 ‘프토코스’는 경제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비참과 소외 속에 뒤처지고 내버려진 상태 전반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프토코이)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칭합니다. 곧 그들은 어느 것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않고, 또 될 수도 없기에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부여잡은 이들이며, 하느님과 그런 긴밀한 유착 속에 있기에 그분이 직접 곁에 계시어 보호하시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주시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공존 관계로 인해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 나라를 누리게 되는데,(20절) 하느님의 현존이 그들 곁에서 항시적으로 시작되고 발생하며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24절)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자기 보호 장치를 갖고 있어서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이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도, 그것이 주는 충만한 평화와 위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인생의 모든 반전이 발생합니다.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이고(21절ㄱ) 배부른 이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며(25절ㄱ) 지금 우는 사람들은 웃게 될 것이고(21절ㄴ) 지금 웃는 사람은 울게 될 것입니다.(25절ㄴ) 그리고 이 모든 반전의 핵심은 행복선언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사람의 아들”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2절 참조) 즉, 모든 행복과 불행의 관건은 우리 삶의 중심에 ‘사람의 아들’을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해리 앤더슨의 ‘산상설교’.

■ 사막의 덤불과 물가의 나무

복음에서 제시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모습은 제1독서에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소묘되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대조적 이미지(“물가에 심긴 나무”와 “사막의 덤불”)를 통해 생생히 보여주는데, 이 이미지들은 인간의 힘에 의지하는 이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를 대별시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7-8절)

창세기에 나와 있듯이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하느님이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됩니다.(창세 2,7) 하느님 없이 인간은 그저 부서지기 쉬운 존재(진흙덩어리)일 뿐이고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숨에 의해 지탱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강하게 하는 진정한 힘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둘 때 발생합니다. 하느님을 의지하는 자는 물 옆에 튼튼히 심겨진 나무 같은 존재이며, 시냇가에 심겨져 있기에 폭염이나 가뭄으로부터도 안전하고 또한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의지하고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이는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으므로 메마른 사막처럼 황폐해지고 죽음의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 죽음과 부활

굶주리고 고통과 박해 속에 울고 있는 이들을 행복하다고 선포한 복음과 제1독서의 내용은 제2독서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행복은 죽음과 부활의 역설적 진리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과 생명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됨을 증명하셨지만 이를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17절)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지혜의 결과이고 지혜는 감수성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가난함과 빈곤이 주는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불행해질 때 본능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정말 위험하다고 인식했을 때 내 삶의 주체가 누구이며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저’(looser)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루저의 감수성’을 갖게 되는 것은 행복이요 은총입니다.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행복에 대한 부질없는 담론과 무분별한 추종을 접어두고, 가난과 환멸, 극심한 불행 중에서 찬란히 피어나는 감수성을 부여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에 대한 헛된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할 기대 속에 현재를 불안과 긴장으로 장악하고, 결국 오늘 하루가 주는 사소한 행복과 알찬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부와 명예가 곧 성공이며 행복이라는 불온한 왜곡은 인간이 꽃피울 수 있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질식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난 다른 행복이란 없으며, 그렇게 날조된 행복은 그저 사회가 생산해낸 또 다른 가면이고 잔혹한 선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조리와 역풍 속에서도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정직하게 매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n※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rn로마교황청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