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죄인이라는 고백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입력일 2019-01-29 수정일 2019-01-30 발행일 2019-02-03 제 313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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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제1독서:이사 6,1-2ㄱ.3-8 /제2독서:1코린 15,1-11 /복음:루카 5,1-11)

“학문을 하면 날마다 늘어나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줄어든다.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무위에 이른다.”(為學日益,為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為) 노자 도덕경 48장의 내용이다. 여기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말한다. 지식의 축적은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객관적인 기준을 찾아 인생을 설계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할수록 지식이 쌓이는(益) 것과 비례하게 번잡함과 난해함도 함께 증가(益)한다. 반면에 도를 행하는 사람, 즉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그 행위를 반복할수록 고집이나 집착이 점점 사라지고(損) 그에 비례해 수고로움이나 의심도 함께 줄어든다(損).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계획과 기준을 내려놓는 것이 되므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위’,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무위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한다.’(無為而無不為) 즉 그는 하느님의 일과 자기의 일이 하나가 돼 ‘스스로는 하는 일이 없지만(無為)’ 그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일이 된다.(無不為) 내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가의 차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이사야와 바오로, 베드로가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 ‘칠삭둥이’, ‘죄인’ 등으로 표현하며 자신이 무능력하거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책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죄 많은 인간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데 반해 위대한 인물들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어야 했다.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비난할 줄은 알았어도 자신과 인생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거나 그분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지는 못했다. 아니 고백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합리적 계산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삶의 기적들을 이해할 방도가 없다.

베드로는 오늘 자신의 인생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경험을 했다. 복음을 읽고 있자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구태여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고 더군다나 베드로에게 고기잡이와 관련된 조언을 하신다. 어부였던 베드로도 아직은 낯선 예수님의 지시에 아무 저항 없이 그물을 내린다.

그는 어부였고 예수님은 목수였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그가 낯선 남자의 한마디에 순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동선에 그의 시선이 줄곧 함께했음을 짐작게 한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가 잡힌 것이다. 이 사건 앞에서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한다.

죄인이라는 고백은 쉽사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모든 것들이 잘못됐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계획한 위치에 끊임없이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 그런데 바로 그 호수에서 예수님의 한마디 지시로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만큼의 고기를 잡은 것이다.

찢어질듯한 그물은 베드로가 상상할 수 있는 희망의 부피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으로는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이 일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지금까지 해왔던 스스로의 계획과 기준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알려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은 근본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게 해준다. 스스로 주인이 돼 계획하고 실패하고 낙담하는, 그래서 날마다 쓸모없는 것이 자꾸만 늘어나는 과거의 삶에서 불신과 두려움이 날마다 줄어드는 신앙의 삶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 전환점에 죄인이라는 고백이 있다.

혹자는 오늘 베드로의 체험이 내심 부럽다고 여길 것이다. 표징을 요구한 유다인들처럼 신앙의 견고함을 위해 그와 같은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희망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나 바람은 여전히 외부적 조건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합리적인 위학(爲學)의 태도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에 의해 이뤄진 일들은 많지 않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의 부모는 왜 그분들이어야 하는지 또 지금의 나는 왜 여기에 서있으며 왜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됐는지 등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구하려 하는 순간 우리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우리 인생은 객관적 지식이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며 초대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도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한 베드로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했고 그의 응답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했던 일이 그에게 똑같이 재현되도록 했다. 즉 예수님에 의해 ‘낚인’ 그는 예수님의 예견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일이 그의 일이 되는 것, 그것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하는’ 신앙의 삶이다. 베드로와 함께 우리 신앙의 주춧돌을 놓은 바오로 사도의 오늘 고백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9-10)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