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김수환 추기경(1922~2009) 선종 10주기 여전히 그립습니다! (중) 내가 만난 추기경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9-01-29 수정일 2019-01-30 발행일 2019-02-03 제 3131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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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면 그 기억은 개인에게는 추억이 되고 개인을 넘어서면 역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기억의 끈은 다시 오랜 인연으로 이어져 삶 자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상한 아버지, 소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는 구요비 주교(서울대교구 해외선교담당 교구장 대리)와 인재근(엘리사벳)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이들의 기억 속에서 인간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을 만났다.

■ 서울대교구 구요비 주교

“실수도 말없이 품어주며 믿어주신 분”

구요비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님은 꼿꼿하고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따뜻하고 자비로웠으며 푸근했다”고 말한다.

구요비 주교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의 기쁨과 희망 그리고 번뇌와 슬픔이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이다. 구 주교가 이야기하는 김 추기경은 그저 고위성직자로서 남기 바란 사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희로애락, 특히 삶의 애환과 고통, 번민을 늘 당신의 문제로 안고 살아갔던 시대의 예언자였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성사적인 존재입니다. 교회를 넘어 우리 사회의 최고 어른이셨던 그분의 얼굴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깊은 신앙심 그리고 영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평화를 얻게 되지요.”

구 주교는 1970년 10월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 찾은 본당에서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났다. 이후 암울했던 1980~1990년대, 우리 시대에 가장 가난한 이웃 중 하나인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김 추기경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구 주교가 기억하는 김 추기경은 자녀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소박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과 설날에 세배하러 가면, 김 추기경은 장관들이나 국회의원 등 유명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들을 가장 반기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가를 함께 부르며 손을 흔들고, “더 크게!”를 외치며 그들과 어울렸다. 또 편지에 답장해 주는 것은 물론, 어려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시간을 내줬다. 한번은 노동 청년들이 몰래 모여 신자 노동자로서 회사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회의를 하는데, 불쑥 그 집을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추기경님이 방문해 문을 두드리자 청년들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수환이다’ 하세요. 수환이가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까 그제야 ‘나 김수환이야’라고 말해 청년들이 다들 놀란 적이 있습니다.”

구 주교는 김 추기경을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라고 말한다. 김 추기경의 이런 모습은 훗날 그가 사제 생활을 하는 데 큰 귀감이 됐다. 특히 프라도회의 정신 중 하나인 ‘사제는 먹히는 존재’라는 가르침, 불어로 ‘옴므 망제’(homme mangé)라는 말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90년 3월 25일 서울 구로1동성당에서 프라도 형제회 회원의 첫서약 미사 후 축하연에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과 구요비 주교. 구요비 주교 제공

아울러 구 주교는 사제의 실수나 과오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구 주교는 “제 의도와 다르게 일이 잘못 진행된 경우에도 추기경님께서는 꾸중 하나 안 하시고 넘어가 주셨다”며 “제 실수임에도 아무 말씀 없이 믿어 주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이 살아 있었다면 그가 2017년 6월 주교로 임명 됐을 때 어떤 말씀을 건넸을까. 구 주교는 “참 잘됐다고 칭찬해 주시면서도 염려하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신학교 영성 지도 신부로 임명받고 인사드리러 갔을 때 추기경님이 제게 ‘참 잘됐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신학생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알려주고, 좋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당부하셨지요. 제가 주교로 임명 됐을 때도 같은 말씀을 해주셨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추기경님께서 저를 너무 순진하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놀라시지 않으셨을까….(웃음) 그래도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김 추기경님께서 저의 부족함을 계속 채워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더불어 구 주교는 “추기경님의 모습을 닮아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일치의 도구이자 평화의 사도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국회의원

“해고 노동자 안쓰러하던 모습 선해”

남편 고(故) 김근태 전 의원 사진 옆에 선 인재근 의원은 “김 추기경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의정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 곁으로 떠난 지 1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한 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고(故) 김근태(즈카르야) 전 의원의 아내이자 오랜 기간 인권운동에 헌신해 온 인재근(엘리사벳) 의원(더불어민주당)은 김수환 추기경을 ‘자상한 아버지’로 기억한다.

그가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난 건 1978년, 해고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단식을 할 때였다. 해고된 노동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며 뒷바라지 하는 역할을 했던 인 의원은 당시 김 추기경이 그들을 방문해 안타까워하시며 위로해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소개했다.

“추기경님이 해고당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찾아오셔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쓰러워 하셨어요. 위로해 주시고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주시는 모습이 자상한 아버지 같았습니다.”

이후 그는 1988년 5월 4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시상식에서 다시 김 추기경을 만났다. 그는 ‘김근태 고문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김 전 의원과 함께 1987년 11월 20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정부가 그의 출국을 거부하면서 투옥 중인 김 전 의원과 그는 해외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결국 이듬해 김 추기경은 가톨릭회관을 시상식 장소로 내주고 직접 참석해 축하도 해줬다.

인재근 의원이 1988년 5월 4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왼쪽 맨 뒤로 김수환 추기경. 김근태재단 제공

또 민주화 투쟁을 하며 김 추기경에 도움을 받은 일화도 소개했다. 당시 감옥에 갇힌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이을호씨가 고문 등으로 인해 정신적 쇼크를 받고 감옥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인 의원은 이씨의 가족들과 김 추기경을 만나러 가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니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후 김 추기경은 이씨를 돕기 위해 애를 썼고, 이씨는 우여곡절 끝에 석방됐다.

그는 “김 추기경님은 감옥에 갇힌 사람, 해고된 노동자, 구속된 학생 등 인권을 탄압 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항상 관심 가져 주셨다”며 “기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목소리를 내주신 모습을 보며 큰 위안이 됐다”고 밝혔다.

더불어 견진성사 때 김 추기경을 만난 일화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전했다.

“김 추기경님이 견진을 축하해 주시면서,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내가 우리 김근태 형제에게 기대가 많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싸웠던 것을 잘 아시거든요. 계속 잊지 않고 관심 가져 주신다는 생각에 든든했습니다. 제 견진성사에서 남편 얘기를 하시니 이 말씀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웃음)”

“추기경님을 참 좋아한다”는 그는 매일 새벽 방송 미사를 보며 가족들 사진과 함께 김 추기경이 기도하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면서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그러면서 해고 노동자들에게 자상하게 다가와 준 김 추기경의 첫 모습을 잊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정활동을 하려고 다짐한다.

“추기경님이 생전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하신 것들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앞으로 의원 활동을 하면서도 김 추기경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추기경님을 닮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