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 이어주는 요한 세례자를 보여주다 정교한 묘사로 이야기 전달 동작 하나하나 현장감 더해 짐승 가죽옷 등 상징물 다양
요르단강에서 받은 예수님의 세례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냄과 동시에 구세주로서 공생활을 선포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기록은 4복음서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15세기 북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1399년경~1464)은 세 폭으로 구성된 제대화에 요한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며 중앙 패널에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그렸다. 왼쪽 패널에는 요한을 낳고 침대에 누워 있는 엘리사벳과 그녀를 방문한 마리아가 갓 태어난 요한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 그려죠 있다. 오른쪽 패널에는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고 있는 살로메의 모습이 그려 있다.
■ 만남을 위한 준비 : “그의 이름은 요한”
왼쪽 패널의 마리아는 갓 태어난 요한을 품에 안고 있다. 나이 든 즈카르야는 의자에 앉아 종이에 아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가 알린 대로 입을 다문 채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쓰고 있다. 요한 세례자의 일생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즈카르야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알리는 모습이나, 베이던의 작품처럼 요한이 태어났을 때의 모습이 주로 그려진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하며 의심했기에 천사는 즈카르야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 때문에 즈카르야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요한을 출산한 엘리사벳은 침대에 누워 있다. 화가는 원근법을 비롯한 입체감으로 공간의 깊이를 확고히 구축하며, 정교한 묘사와 다채로운 채색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침대 뒤쪽 멀리에는 산모를 축복하기 위해 문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보인다. 전형적인 북유럽 가정의 실내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환하다. 공간을 가득 채운 밝은 빛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빛처럼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도록 인도하는 듯하다. 늙고 나이 들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냐고 반문한 부부에게서 요한 세례자가 태어났다.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에 “예” 하고 순종한 마리아의 태중에는 예수님이 자리하고 있다. 마리아는 자신의 태중의 아기 예수와 요한 세례자와의 만남을 준비하려는 듯 갓 태어난 요한을 자신의 품에 포근히 안고 있다. ■ 사명적인 만남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중앙 패널 왼쪽에 있는 요한 세례자는 털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물을 부어 세례를 베푼다.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주고 있는 예수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당시 15세기는 인체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르네상스 시기였는데, 베이던은 사실적인 인체에 현장감 넘치는 요소를 강조하며, 관람자와 그림자를 친밀하게 느끼게 한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 위로 성부 하느님이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며 외아들의 현존을 기쁨으로 드러내는 듯,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세례 순간 성부의 음성이 빛 속에서 들려온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성부 하느님, 비둘기, 요한의 손에서 떨어지는 물, 예수님의 축복하는 손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일직선을 형성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 자체임을 말해 준다. 오른쪽의 천사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벗어 놓은 옷을 들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이 동작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보냈고, 하느님과 같은 본성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고 완전히 비우는 케노시스(Kenosis)의 겸손을 실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곳은 요르단강이지만, 화가는 북유럽 지역을 배경으로 묘사했다. 요르단강은 구약의 두 가지 사건, 곧 출애굽 때 홍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건넜던 요르단강을 의미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요르단강은 세례 후 공생활 동안 겪게 될 수난을 암시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연결된다.윤인복 교수 (아기 예수의 데레사·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rn이탈리아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