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본당 주보성인] 성 정하상 바오로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9-01-08 수정일 2019-01-15 발행일 2019-01-13 제 312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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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영입에 힘쓴 대표 평신도
버드내·양평·대학동본당 등과 
수원가톨릭대·하상출판사 주보

양평성당 성 정하상 동상.

제2대리구 양평성당 앞마당. 한복을 차려입은 동상이 인상적이다. 동상의 인물은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오른손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에는 책 한권을 들고 있다. 책에는 「上宰相書」(상재상서)라고 적혀 있다. 상재상서는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하상(바오로) 성인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호교론서다.

성인은 1801년 신유박해로 산산이 흩어진 교회 공동체를 재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진행, 조선교구 설정을 이끈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다.

성인은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성녀 유소사(체칠리아)의 둘째아들이다. 복자 정철상(가롤로)은 성인의 형이고, 성녀 정정혜(엘리사벳)은 성인의 여동생으로, 성인의 가정은 온 가족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믿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성인은 신유박해와 을해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1816년 만 21세의 나이로 중국 베이징으로 떠나 중국교회에 조선교회의 소식을 전했다. 이후로도 9차례나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성직자를 조선에 영입하기 위해 힘썼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성인은 걸어서 중국을 오갔다.

교회에 헌신한 성인의 열성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주께서는 우선 우리의 베이징 보행군으로 나이 42세에 아직 독신이며 우리들을 모두 조선에 인도하여 들인 신자(정하상)를 찾아내는 은혜를 주셨다”면서 “나는 3년 안으로 신품을 줄 희망을 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성인의 노력으로 마침내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됐다. 아울러 1836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말에는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등의 신학생을 이끌고 중국을 향했으며, 귀국하면서는 샤스탕 신부의 입국을 도왔다. 이후로도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이고, 주교의 사목활동을 보필하는 복사 역할을 수행했다.

앵베르 주교는 성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며 사제품을 줄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성인은 순교를 예감하고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직접 작성했다. 이 책이 바로 「상재상서」다. 성인은 이 책을 통해 교회의 기본적인 교리를 설명하고, 교회가 주자학적인 전통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회의 윤리를 바르게 한다면서 신앙의 자유를 호소했다. 성인은 1839년 9월 22일 44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다.

교구 내 본당 중에는 제1대리구 버드내·송현·원삼·팽성본당, 제2대리구 가남·대학동·벌말·오포·양평·하남성정하상바오로본당이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본당 외에도 수원가톨릭대학교나 하상출판사 등의 기관들도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이자 「상재상서」를 펴내 신앙을 전한 성인의 모습을 닮고자 주보성인으로 삼고 전구를 청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