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작고 허름한 존재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n※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rn로마교황청립성
입력일 2018-12-18 수정일 2018-12-19 발행일 2018-12-25 제 3125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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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4주일
제1독서 (미카 5,1-4ㄱ)  제2독서 (히브 10,5-10)  복음 (루카 1,39-45)

모든 몰락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절박한 마음으로 성찰하며 시작하는 것이 ‘새 시대’입니다.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이스라엘의 경건한 이들은, 하느님의 진실과 가난한 이들의 선함이 날조되고 왜곡되는 파국의 징조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화려하고 위계적이며 무력만을 앞세워 통치하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고, 박애와 평등, 사랑과 관용으로 양떼를 돌보는 목자적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는데, 그 메시아는 허름하고 보잘것없지만 단정하게 존엄을 지켜온 이들, 가난하기 때문에 나눔에 더욱 관대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 자신이 평화”(미카 5,2)가 되어 오십니다.

성탄을 바로 앞둔 대림 4주일의 본문들은 고요하고 겸허하게 존재해온 이들 - 나자렛의 마리아와 유다 산악지방의 엘리사벳, 작은 고을 베들레헴 - 이 하느님의 일(Opus Dei)에 선택됨을 선포합니다. 간절히 기다린 사람에게만 상대방의 도착은 기쁜소식이 됩니다. 가난하지 않다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그를 자신의 유일한 힘으로 믿고 의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 복음의 맥락

루카복음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1,39-56)를, 두 개의 탄생예고(세례자 요한[1,5-25]와 예수님[1,26-38])와 두 개의 탄생이야기(세례자 요한[1,57-80]과 예수님[2,1 이하]) 사이에 배치시킵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을 중심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어머니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39-40ㄱ절), 마리아가 인사하는 장면(40ㄴ-41절), 엘리사벳이 이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장면으로 진행됩니다.(42-45절)

■ 불행을 감내해온 사람들

성경이 제작되던 시기, 여성이 존중받을 수 있던 유일한 조건은 자녀 출산을 통해 공동체 강화에 기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소속된 공동체(가문, 부족)의 인원수는 그 자체로 노동력이고 경제력이며 군사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 공동체에 그 어떤 이득도 주지 못한다고 간주되어 주체적 존재성을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엘리사벳은 외부적으로는 명망 높은 사제 가문의 부인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결함 때문에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살 수밖에 없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직면했던 고통은 단순히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현실적 한계를 넘어, 유다인들의 전통사상인 신명기적 사고(자녀 없음의 고통을 죄의 벌로 인식)에 입각한 주변의 은근한 멸시와 부당한 취급,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내면적 슬픔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지해야 할 사회적 품위와 애써 숨겨야 할 불안과 민망함이 서로 충돌하는 숙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며 자신의 가난함을 감내해온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기 어려운 이들을 일관되게 선택하시기 때문이고, 이러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이제 곧 태어나실 메시아가 선포할 기쁜소식이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기쁜소식을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전하심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찾아왔다는 것은 곧 태중에 계신 구세주의 오심을 의미하기에 엘리사벳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43절)라며 감격스러워합니다. 가난하고 존재감 없으며 그 어떤 권력의 범주에도 속하지 못했던 마리아를 찾아오신 하느님처럼, 이제 마리아와 태중의 메시아는 또 다른 가난한 존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리오 로셀리의 ‘방문’.

■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

가난함과 보잘것없음이 주는 역설적 아름다움은 제1독서에도 미카 예언자를 통해 강조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장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5,1)가 오실 것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평범함은 “보잘것없지만”이라는 수식어로 묘사되는데,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짜이르’는 ‘작은’, ‘의미 없는’, ‘하찮은’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즉 작고 무의미하며 존재감 없는 장소이지만 그 사소함이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받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던 다윗의 고향이었고,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왕국을 이룩한 왕이 되었음은, 앞으로 오실 다윗의 후손 역시 목자적 리더십을 보여줄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돌보는 역할을 하고, 특별히 훌륭한 목자일수록 양들의 개별적 특성을 잘 알고 양들 역시 그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관계성을 유지합니다. 양떼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누군가 자신을 예뻐하고 보호해준다고 느낄 때 쉽게 그를 따르고 싶어 합니다. 공격이나 살상 없이 세상의 질서를 세우는 통치가 바로 이런 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자신을 드리는 가난함

제2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제1독서의 목자적 이미지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정확히 일치함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5-7) 예수님의 생애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본문에는 총 4개의 제사 - 제물과 예물(5절), 번제물과 속죄제물(6절) - 가 등장하는데, 이는 구약의 제사 전체를 망라하는 기능을 합니다. 희생제물과 예물은 서원과 봉헌의 표시로 매우 고귀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용서를 이기적으로 획득하기 위한 치졸한 방식으로 악용될 수도 있는 함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40,7-9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은 더 이상 동물을 바치는 번제나 속죄제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에 순명하기를 원하심을 알려줍니다.(8-10절) 아무리 많은 제사를 바친다 하더라도 온전히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목자이신 메시아는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침으로써 단 한 번에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성탄이 가져다주는 기쁜소식의 핵심인 것입니다.

삶이 주는 슬픔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냥,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런 장소, 사람, 풍경을 대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 어린 애정과 연민, 존경이 생겨나곤 합니다. 하느님의 진심도 비슷해서, 부조리와 비참 속에서 의연히 삶을 지탱하는 존재들을 사랑하시고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세상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작고 하찮으며 보잘것없어서 상처받은 존재들에게 전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간절하고, 혼자 울먹이며, 혼자 혹독하게 삶의 본질 주변을 서성였던 여러분은 “행복하십니다!”(루카 1,45) 주님만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한 마음을 그분께서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이 고달프고 쓸쓸한 모든 분들에게, 메.리.크.리.스.마.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n※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rn로마교황청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