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

[생태칼럼] (36) 기다림 / 박그림

박그림 (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
입력일 2018-12-18 수정일 2018-12-18 발행일 2018-12-25 제 312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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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철이면 가슴에 그리움의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그리움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눈 덮인 산으로 끌어들여 짐승 발자국 속에 담긴 삶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게 한다. 눈 위에 발자국이 없다면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한가, 발자국이 있으므로 얼마나 따뜻한가. 골짜기를 타고 올랐을 산양의 모습을 그려보며 발자국을 따라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바위굴 앞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산양 똥을 한 줌 집어 가슴 속 깊이 냄새를 빨아들인다. 산양 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아 위장막을 치고 들어가 사진기와 쌍안경을 세운다. 쪼그리고 앉아서 산양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이 이어진다.

햇볕에 따뜻해진 위장막 속에서 마음은 느슨해지고 몸은 노곤하게 풀어진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졸다가 작은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고 산양을 찾아보지만, 숲은 다시 고요와 정적 속에 묻힌다. 오후의 엷은 햇살이 산양 굴에 스며들고 빈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인다. 기다림 속에서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 어둠이 배어들면 밤하늘은 별 밭이 된다.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다가오던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멈추고 잠깐의 정적이 영원처럼 느껴질 때 귀에 익은 산양의 울음소리는 북받치는 그리움으로 온몸을 떨게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을 산양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떨리는 기쁨인가. 어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둠조차 고마워진다.

온갖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몸을 뒤틀며 견디기 힘든 시간도 잠깐, 오직 산양을 기다리는 일에 빠져들고 나를 잊는다. 깊이 잠들지 못했던 밤이 지나고 검푸른 하늘에 배어드는 붉은 빛과 생명의 소리로 하루가 열린다. 새벽의 차가움이 온몸을 감싸고 침낭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작은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갈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둠 속에서의 만남이 짙게 남아 산양을 만날 수 있으리라 잔뜩 부푼 기다림으로 맞는 아침은 커다란 설렘이다.

기다림은 그렇게 시간을 넘어 끝내 얻어지는 것들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기다리는 동안 주어졌던 시간 속에서 삶은 또 얼마나 깊어졌던가. 며칠을 기다림 속에서 보내고 산길을 내려오면 산양을 보고 못 보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만났던 생명의 흔적과 소리는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고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움은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기다림 끝에 얻어지는 것들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박그림 (아우구스티노)rn녹색연합·‘설악산국립공원 지키기 국민행동’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