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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크리스마스 선물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8-12-18 수정일 2018-12-18 발행일 2018-12-25 제 3125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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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할아버지가 어떤 선물을 건네줄지 궁금해 하며 마냥 신이 났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제가 8살 때 산타할아버지가 오지 않아 무척 아쉬웠지만, 어머니가 병이 나셔서 산타도 오지 못 했던 사연을 듣고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아버지는 동지팥죽을 쑤어서 어린 저를 데리고 중랑천 뚝방에 가셨지요. 어둑칙칙한 나무더미(판잣집) 사이에서 얼굴도 시커먼 분들이 나오셨는데,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셔서 팥죽을 그분들께 정성껏 대접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왜 지저분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춰가며 예우를 다 하셨는지, 그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제 인생에서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보다도 더 아름다운 향기로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선물은 ‘돈’의 잣대로 평가되기 쉽지만, ‘선물’의 논리는 ‘돈’의 논리와는 원래 다릅니다. 선물을 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이들에게로 향하는 ‘인격적인 관계 행위’이며, 이를 통해 서로서로를 사랑하고 감사하는 ‘호혜성(互惠性)’이 자라납니다. 선물은 특별히 상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마음에서 때론 보상과 답례를 기대하지 않고 나눠주고 싶은 ‘무상적 증여’의 차원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 선물을 받은 이들은 또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준 이들에게 다시 선물을 나눠주기도 하기에 ‘호혜적 증여’가 이뤄지지요.

그런데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체제가 우리네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우리는 선물마저도 ‘돈과 효용성’의 잣대로 주고받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경조사 때 최소한 받은 액수만큼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는 부조금 문화가 철저히 ‘돈의 잣대’로 형성되어 왔고, 또 이웃을 도울 때 시간을 내어주고 얼굴을 대면하기보다는 ‘돈’으로 기부하는 편이 더 편리하고 효용적이라고 판단하기도 하지요. 한편 정관계 기업에서는 사업청탁의 로비(뇌물)가 관행처럼 남아 있어서, 선물의 본원적 의미에 대한 성찰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의 핵심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지요. 성탄(聖誕)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인류에게 ‘무상으로 또 전적으로’ 다 내어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뭔가를 잘 해왔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받은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완전하고 나약하면서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어둠’ 속에 살아가기에, 하느님께서 몸소 ‘참된 빛’으로 오셨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화려한 궁전은커녕 여인숙에도 자리가 없어서, 사람이 머물 곳도 안 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말구유’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강생의 신비는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과 희망을 전해 줍니다. 우리네 삶의 가장 낮은 밑바닥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시어 몸소 강생하심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자리’를 거룩하게 축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에 빛을 기다립니다! 다사다망(多事多忙)했던 2018년, 우리 주위에는 실패와 좌절, 고통과 상처, 불안과 걱정 속에서 불확실한 일상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북 간 대화의 물꼬는 터졌지만 종전선언과 화해의 길은 아직 요원해 보이고, 적폐 청산은 점차 희망고문이 되어가는 듯 민초의 염원은 ‘기득권 세력’의 완고함에 가로막혀 보입니다. 장기 경기침체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 중에 생존의 벼랑 끝에 몰려서 굴뚝 위에서 차디찬 겨울을 보내는 노동자는 언제 웃으며 내려올 수 있을지…. 그럼에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아기 예수 강생이 인류에게 참된 선물임을 믿기에 희망 속에서 그 신비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선물은, 바로 강생하시는 하느님의 마음 전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기꺼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천상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세상 밑바닥에 강생하신 예수님의 그 마음이, 삶의 여정에서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던 ‘내 마음의 말구유’에 먼저 임하시어 우리도 이웃에게 나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나아가 우리 세상의 어둠 한복판을 비춰주시기를 청합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반복되는데, 내가 예수 강생의 신비를 살아가지 못 한다면,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