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김혜숙(막시마) 선교사rn※ 김혜숙 선교사는rn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
입력일 2018-12-11 수정일 2018-12-12 발행일 2018-12-16 제 312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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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제1독서 (스바 3,14-18ㄱ)  제2독서(필리 4,4-7)  복음(루카 3,10-18)

오늘 전례는 온통 기쁨을 알리는 표징과 말씀들입니다. 제대와 대림환의 초도 제의 색상도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도 그렇습니다. 그냥 기쁜 것이 아니라 두 손을 쳐들고 환호하며 춤추는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사랑으로 나를 새롭게 하고, 그분 또한 나 때문에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때문입니다.(1독서, 17절) 그리고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그 신발의 의미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원인을 더 깊이 해줍니다.

복음의 전반부(10-14절)는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 말하는 요한 세례자의 선포에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군중들도 세리들도 군사들도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다는 것은 요한의 선포를 듣고 마음에 무엇인가 와 닿았다는 뜻입니다. 변화를 위한 자유로움이 그들 마음에 생긴 것입니다. 답변에 나선 요한은 특별한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상의 변화, 곧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변화를 말할 뿐입니다.

옷도 먹을 것도 현재 자신의 것을 제외하고는 가지지 못한 이와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선포입니다. 이는 선을 향한 자유의지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불의하고 부조리한 것은 부의 분배가 균형을 잃었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삶을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루카 복음의 특징이 잘 드러난 부분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하늘을 향한 수덕생활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지상의 가난함에 향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유한 것에 만족할 수 없어 더 많은 것을 추구한다면, 더 갖고 싶은 욕망에서 타자의 것을 자기 것으로 탐낸다면 자신의 욕망이 결국 자신의 참 기쁨을 앗아갈 것입니다. 자신의 몫보다 더 취하지 않고 가진 것에서 기쁨을 누리는 요한의 모습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요한 세례자의 말을 듣고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에 차 있을 때, 요한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신발의 상징적인 의미를 인간과 신적 일치로 설명합니다. 요한은 인간과 신이 만나 일치를 이루는 자리에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분은 오시는 그분입니다. 그분의 삶이 그것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신발을 벗기기 위해 선재 되어야 할 끈을 푸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발의 또 다른 신비적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요한 3,29)이고, 자신은 신부의 친구가 아닌 신랑의 친구로서 기쁨에 넘친다고 말합니다. 신발은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 누구도 신랑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그분만이 신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발 끈을 풀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신발을 벗겨주는 봉사 행위를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신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권리도 자격도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알고 지키는 요한 세례자의 기쁨에 넘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신랑은 하늘의 권리를 지니고 땅의 신부를 찾아오시는 분이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새롭게 다시 세우는 분입니다. 지금 신부(우리 각자)는 그 신랑과 나누게 될 기쁨과 사랑으로 흥분되어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의 ‘그리스도의 공현’.

신구약 모두에 계시된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고 계약을 맺고 혼인적 사랑을 나누고자 원하신 분입니다. 이제 성자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혼인’이라는 형상에 든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고 신부에게 함께 할 것을 초대합니다. ‘혼인’의 형상에 든 질료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혼인의 내적 길은 ‘완전한 기쁨, 완전한 행복’을 향하는, 곧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사랑의 특징은 주인과 종, 명령과 복종의 형식이 아니라, 부르심(이끔)과 응답(끌림)으로 형성되는 인격적인 친교입니다. 신랑-신부는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탁월한 스스로의 선택과 자유를 통해 상호 내어줌과 받아들이는 인격들간의 친교를 나누는 일치, 곧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한 몸은 한 쪽이 없어지거나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 선을 향한 같은 지향에서 얻어지게 됩니다.

왜 우리를 부르시고 계약을 맺고 혼인적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셨는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사랑이요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신부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준 그리스도 사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매일 일어납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로, 신부와 일치하는 신랑의 혼인적 속성으로,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언어로 신부에게 옵니다. 신뢰에 바탕을 둔 희망과 사랑이 충만한 기쁨이요 전혀 단식할 필요가 없는 기쁨이 넘치는 잔치입니다.(마르 2,18-20; 마태 9,15; 루카 5,33-35)

이 사랑은 자신들에게 머물지 않고 더 큰 것을 갈망하게 하고 나를 변화시킵니다. 나의 내면을 건드리고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합니다. 사랑 그 자체의 역동성이 확산되고 누구로 살 것인지 응답을 선택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2독서, 5절) 우리의 자선이 세상의 자선과 다른 이유가 여기 나타납니다. 단순히 나눔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사랑으로 열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열고 나간 나의 모습에서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모습이 드러납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그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이 시간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겠습니다. 목동들도 동방박사들도 만나기 위해 습관에 젖어있던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가난한 베들레헴 말구유였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낮은 곳이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의 만남이 인간의 갈망을 채우고 기뻐 춤추게 합니다. 자신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성탄이 나에게 준 선물입니다.

김혜숙(막시마) 선교사rn※ 김혜숙 선교사는rn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