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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보도자료 검증 않는 ‘발표 저널리즘’ / 김지영

김지영 (이냐시오) 전 경향신문 편집인
입력일 2018-12-11 수정일 2018-12-11 발행일 2018-12-16 제 312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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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⑦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라는 미국 영화가 있다.(원제 「All the president’s men」)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보도’를 그린 작품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가 1972년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발생한 민주당 사무실 도청사건을 2년에 걸쳐 집요하게 파고들어, 재선에 성공한 리처드 닉슨을(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물러나게 한다. 그 취재보도 과정은 세계 언론역사에 탐사보도의 금자탑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화 또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기자들의 직업생태와 편집국 분위기부터 현장 취재 및 보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투철한 저널리즘 등을 너무나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

영화 중 한 대목.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두 기자가 관련 기사 한 건을 써서 담당 부장과 함께 ‘특종’이라며 들떠 편집인 벤 브래들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기사를 읽어보던 브래들리 편집인은 “안 돼!” 하고 잘라 말한다. 의아해하는 두 기자와 부장에게 브래들리 편집인은 “헌트가 빌려갔다고 한다”는 표현은 안 된다며 “누가 그렇게 말했느냐”고 물어본다. 두 기자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냥 한 귀퉁이에 실어!”라며 묵살해버린다.

말하자면, 앞선 칼럼에서 수차례 언급했듯이 보도기사는 ‘사실 확인과 검증’이 우선이며 그러려면 분명한 취재원이 있어야 하고 기사에서 그 취재원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취재원도 없이 ‘~했다고 한다’ 또는 ‘~로 알려졌다’ ‘~로 전해졌다’ 와 같은 표현의 기사는 이른바 ‘카더라’ 식의 보도로 부정확한 사실, 왜곡된 사실을 전할 뿐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벤 브래들리 편집인만 그 같은 저널리즘 원칙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의 신문사 편집국과 방송사 보도국의 모든 책임자들도 그 원칙을 잘 알고 있으며 후배 기자들에게 강조한다. 하지만 이 원칙은 갈수록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사실에 대한 확인과 검증을 소홀히 하는 현상은 ‘보도자료 베끼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보도자료라는 것은 정부, 정당, 기업, 단체, 개인 등 온갖 취재원들이 기자들에게 특정 사안에 대한 사실관계와 의견을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도자료는 취재원이나 기자 모두에게 불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줄여주는 효율적인 매체다. 하지만 취재원과 기자에게 그 존재의미는 서로 다르다. 취재원들은 가능한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과 의견을 담으려 하고(이른바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려 하는), 기자는 자료에 나타난 내용을 확인하고 검증하며 보완 취재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취재원들은 때때로 불리한 사실관계는 은폐하거나 조작하기도 한다. 가령 1987년 박종철군 사망사건이 발생한 뒤,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던 경찰은 결국 사망 사실을 시인하면서 보도자료를 내고 발표한다. 당시 보도자료에 따르면 조사관이 책상을 ‘탕’치니까 박군이 ‘억’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만약 기자들이 보도자료에 나타난 사실을 확인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면? 기자들은 다시 한 번 국민과 역사 앞에 큰 죄를 짓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신문윤리실천요강 제3조 7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취재원이 제공하는 구두발표와 홍보성 보도자료는 사실의 검증을 통해 확인 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처럼 보도자료의 사실 확인과 검증은 저널리즘의 원칙이지만 동시에 법적 기준이기도 하다. 법원의 언론 관련 판결 중에는 기자가 보도자료 내용을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가 소송을 당해 패소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정부에서 제공한 보도자료의 통계수치를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는데, 설사 틀린 자료내용으로 인해 보도가 잘못됐다 하더라도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사실 확인과 검증의 책임은 기자에게 있는 것이다.

국내 인터넷 매체만 8천 개에 달하는 요즘, 전통매체를 포함해 수도 없이 많은 매체의 기자들과 개인 기자들이 기사를 쓰고 있다. 그중 상당수는 보도자료를 받아서 사실 확인과 검증도 없이 그대로 베껴 쓰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보도자료를 자주 내는 큰 조직들은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팀에 우수한 인력을 배치해 아예 보도자료가 아닌 기사를 작성해 배포한다. 어떤 취재기자들은 취재원들이 작성해준 기사를 베껴 쓰는, 거꾸로 된 세상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학술적 용어는 아니지만 언론계에선 이 같은 행태를 두고 ‘발표 저널리즘’이라고 자조 섞인 개념 정의를 하고 있다. 사실 확인과 검증을 위해 기자들은 질문을 한다. 기자들이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쓰고,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쓰며, 질문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진실을 외면하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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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이냐시오) 전 경향신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