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그냥’ 쓰레기 줍기 / 김형태

김형태 (요한) 변호사
입력일 2018-11-27 수정일 2018-11-28 발행일 2018-12-02 제 3122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독일의 신학자 한스 큉 신부는 ‘왜 그리스도인가’라는 물음을 주제로 책을 썼습니다. 신자들 누구에게나 가장 쉽게 떠올려지는 답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입니다. 하지만 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게 자칫 이 개체 ‘나’의 영원한 지속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이기심을 버리라는 모든 종교의 핵심에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 오기 십상입니다. 종교인들이 비신자들보다 더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종종 받게 되는 이유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물음의 제대로 된 답은 아마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장자(莊子)는 “至人無己(지인무기) 경지에 도달한 이는 자기가 없고, 神人無功(신인무공) 신인은 공로가 없으며, 聖人無名(성인무명) 성인은 이름이 없다 했습니다.

이제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도봉산 만장봉을 향해 오르는 산길엔 늘 그렇듯 누군가 버린 사탕 껍질이며 음식 싸온 비닐봉지들이 굴러다닙니다. 나는 이걸 열심히 주우며 버린 자들 욕을 합니다.

같이 가던 친구가 보다 못해 내게 한마디 합니다. “욕을 할 거면 줍지를 말든지, 주울 거면 욕을 하지 말든지. 욕해서 쓰레기 주운 공을 도루묵으로 만드네.” 뭐 딱히 공을 세우려고, 불가의 표현으로 착한 업을 지으려고 줍는 건 아니지만 친구 말이 옳지요.

쓰레기 버리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인 게 세상 이치입니다. 쓰레기를 보면 그냥 주우면 될 걸 가지고 그걸 버린 이를 욕하고 투덜대는 건, 사탕 껍질을 버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늘 있기 마련이라는 세상 이치에 감응하지 못하는, 세종 임금 말씀마따나 ‘어린 백성’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칭찬받으려고, 혹은 착한 업을 지으려고, 혹은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에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길에 떨어진 사탕껍질을 줍는 것.

금강경에서는 이 경지를 이렇게 가르치더군요.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어디에도 머문 데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우리 마음은 늘 그 대상이 되는 모양이나 소리, 개념을 좇아 그것에 매이는 게 상례여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낸다는 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이 말씀보다는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이 내게는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더 쉬워 보입니다.

“너는 행위 그 자체를 할 권리가 있을 뿐 그 행위의 열매를 누릴 권리는 없다. 행위의 열매를 네 행위의 동기로 삼지 말아라. 나아가 네 안에 아무런 행위도 않으려는 집착을 가져서도 안 된다.”

행위의 결과를 취하려는 의도에서 어떤 일을 하지 말고 ‘그냥 행하라’는 「바가바드 기타」 2장 47절의 이 말씀은 이 경전 전체의 핵심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결과를 중시하는 정치의 장에서 행위하면서도 늘 이 구절을 되새겼습니다.

천당 가려고 착한 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착한 일을 하라는 이 가르침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알려 주셨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부도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여러분이 정의와 일치하고자 한다면 행하되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상이나 복을 바라지도 말라.”

만장봉 옆길을 돌아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내 바지 뒷주머니와 배낭 옆구리는 주운 빈 페트병이며 종이컵, 사탕 껍질로 제법 불룩해졌습니다. 이거 하나 주울 때마다, 그 버린 자들을 욕해대거나 아니면 내가 이렇게 멋진 놈이야 으스대지 말진저.

‘그냥’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인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름 없는 성인이요, 공로를 좇지 않는 신인이요, 자기를 버린 지인이 되겠지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 (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