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진리는 선포가 아니라 증언하는 것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n※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rn로마교황청립성
입력일 2018-11-20 수정일 2018-11-20 발행일 2018-11-25 제 312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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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제1독서 (다니 7,13-14)  제2독서(묵시 1,5ㄱㄷ-8)  복음 (요한 18,33ㄴ-37)

지배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가진 것으로 군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진 것 없이도 존엄을 지키는 일이며, 명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고, 존재감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 진리이고 이 보편적 진리를 증언하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세상의 온갖 모욕과 비웃음을 견디시며 사랑의 완성으로 진리를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기념합니다. 진리는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온 누리의 임금”, “세상 임금들의 지도자”(묵시 1,5)라고 부릅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의 본문인 요한 18,33-38은 로마 총독 관저에서 진행된 예수님의 재판 장면(18,28-19,16)에 속하며, 소송의 직접적 원인이 드러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의 관저로 보냅니다. 당시 죄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은 오직 로마 정부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그의 당연한 권한이요 의무로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시작합니다. 다만 오늘 본문은, 영원한 왕국의 통치자가 멸망할 왕국의 통치자 앞에서, 해방자이신 분이 묶여있는 죄수의 모습으로, 거룩함과 선(善) 자체이신 분이 죄인으로 법정에 서 계시다는 팽팽한 긴장과 모순을 배경으로 합니다. 밤새도록 병사들의 조롱과 고문을 받으셨고 이제 곧 사형에 처해질 상황이지만 놀라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이 진정한 왕권인지를 주도면밀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 진정한 왕권의 본질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빌라도의 심문은 고발의 내용을 분명히 하며 시작됩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죄는 왕이 되고자 민중을 선동한 데에 있었고(루카 23,2 참조) “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들의 왕”(요한 19,19)이라는 십자가의 팻말이 이를 확인시켜줍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34절) 예수님은 이 질문이 빌라도 자신의 말인지 유다인들의 말인지를 되물으십니다. 이에 빌라도는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35절)라며 고발은 유다인들 측에서 있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첫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받지 못한 빌라도는 다시 직설적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나라와 그 속성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할 시간임을 아시고 선언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36절) 사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은, 수직적 권력체계를 군림의 힘으로 사용하던 기득권자들이나 통치자들에게 적대적이셨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들의 움직임에 부정적이셨으며 스스로 왕이라고 천명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분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간과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즉 로마 총독의 관저와 사형선고를 받을 죽음의 시간 앞에서 당신의 왕국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나라는 기존의 통치, 즉 지배와 군림, 선동과 전복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님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 흘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차별성을 갖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나라가 지배와 군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파스카야말로 매우 적절한 기회였습니다. 가장 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에 집결하고 모이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폭동이나 대항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힘을 통솔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권력 지향적 통치가 아닌 진리를 증언하는 통치를 지향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빌라도는 재차 고발 내용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왕권을 완벽히 선언하는 또 다른 자리가 됩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37절)

미할리 문가치의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 진리의 증인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러 오신 예수님은 진리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죽으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성실한 증인”(묵시 1,5; 제2독서)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심으로써 이룩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전적인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성실한 증언’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바치는 통치는 그 어떤 힘도, 심지어 죽음의 힘까지도 이겨냅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의 맏이”(1,5)라고 묘사합니다.

■ 영원무궁한 나라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인류의 역사는, 제아무리 절대적 명성과 화려함으로 세상을 지배한 나라라 해도 언젠가는 쇠퇴와 몰락의 역사를 겪지 않은 적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멸망하지 않고 그 영원성을 유지할 것임이 선포됩니다.(제1독서) 그래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지상에 드러난 하느님이시며(1,8) 알파와 오메가(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엄한 선포로 교회력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다음 주일부터 새로운 전례력의 본문을 읽게 됩니다.

사람은 지독한 억압을 받으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종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공동선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이루어진 혁명이라 하더라도 공포와 살상, 위협과 파괴가 숨어있는 것이라면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참혹한 폭력의 또 다른 변주(變奏)가 될 뿐입니다. 혁명도 진보도 저항도 타인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질 때 치명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진리는 현재의 체제를 견고히 다지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증언해야 할 본질이요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내용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상처와 아픔, 분노와 슬픔, 굴곡과 뒤틀림을 온전히 받아안고 자신을 헌신하는 권위만이 군중을 모이게 하고 기꺼이 추종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랬고 그 나라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를 알지 못할 때 통치자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n※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rn로마교황청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