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흐르는 시간의 겨울 단상 / 김숙경(크리스티나) 시인

김숙경 (크리스티나) 시인
입력일 2018-11-20 수정일 2018-11-20 발행일 2018-11-25 제 312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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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야기도 저물어 간 한 해의 후반부. 흐르는 것과 다가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빈 화면을 응시한다. 한 해의 끝자락이자 주님의 성탄과 필자의 생일과 본명 축일이 든 12월.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지만, 새해를 맞는 또 다른 시작이다.

한적하고 들녘이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 느리게 자아를 들여다보며 보내는 여생을 동경했다. 우리 부부는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다가 지난 5월 햇살이 눈부시게 밝은 날 이사했다.

척추수술 의료사고로 오른쪽 다리 전체 통증이 극심해서 모든 사회 활동을 접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주 눕게 되던 몇몇 년. 무위하게 흐르고 마는 시간이 더없이 아까웠다. 원치 않게 장애인이 된 이후 느린 걸음걸이조차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들녘이 가까운 이곳. 이 소박한 시골집의 이름을 우리는 ‘초연’(超然)이라 달아주었다.

‘창세기’에서 이주를 명령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절대적으로 순명한다. 이유나 변명을 대지 않고 바로 이주를 감행했던 온전한 믿음이 참으로 놀랍다. 반대로 나와 남편은 각각 70, 80세를 바라보는 다 늦은 이때에 이주했다.

우리의 이주는 하느님께 그간의 사연을 아뢰며 귀 여겨 들어주시옵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리며 시작됐다. 간절하게 원하며 했던 기도가 현실이 돼, 낯선 이곳 초연에 발을 들여놓았다.

화려한 외관이나 관상이 목적이 아닌 소박하고 실용적인 초연에서 열어가는 인생 후반부. 흙을 만지며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땀을 흘리며 흙 묻은 손을 합쳐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꿈이 현실이 됐다. 여기저기 금이 쩍쩍 간 마당을 가로질러 뒤꼍의 밭에서 한여름 땀을 흘리며 쉼 없이 돋아나는 풀을 뽑고 또 뽑았다.

조밀하게 자란 채소를 솎아내고 잠시 하늘바다를 유영하는 느린 구름의 움직임을 올려다보는 맛. 부지런히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뿌듯한 맛. 시도 때도 없이 흙 묻은 손을 모으고 산 넘어 먼 데 있는 하늘을 우러르는 화살기도의 맛.

“이리도 은혜로운 시간을 허락하시니 그저 감읍합니다.”

읊조리는 작고도 작은 사람의 짧은 기도의 맛. 땀을 씻고 잔멸치를 넣어 가지나물을 만들고 근대를 넣은 감잣국에 고기를 굽고 상추쌈에 된장 찍은 고추를 툭 베어 먹는 맛.

“당신은 누구시기에 저희가 마른 땅에 단지 씨앗을 뿌리기만 했는데 가꾸고 자라게 하시어 식탁에 앉아 더없는 감동에 취하게끔 선물해주시는지요.”

옷깃에 실바람을 담아 초연에 동화되던 여름이 갔다. 늦은 가을 곱던 단풍이 낙화하는 아쉬움도 가고 작물의 수확과 갈무리도 나름 꼼꼼하게 해뒀다.

비할 데 없이 가난한 주님의 성탄을 기리는 12월. 내년을 기약하는 새로운 시작의 때. 명예나 앎이 인생 여정에서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음을 통감한다. 초겨울 빈 밭에서 비움의 자아성찰을 한다.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고개 숙여 경배하리라. 또한 성탄 다음 날인 크리스티나 성녀 축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생명이 돋아 날 희망의 봄을 기약하고자 한다. 이 찰나의 묵상까지도 인생의 뒤안길로 도도히 흐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과 삶 모두가 더욱 감사하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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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경 (크리스티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