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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무엇을 배우며 사는가? / 오세일 신부

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일 2018-11-20 수정일 2018-11-22 발행일 2018-11-25 제 3121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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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교육관을 자주 칭찬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과도한 입시경쟁과 학벌주의 등 복잡하고 골치 아픈 현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배움’에 문제가 있음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배움은 무엇일까요? 아름답고 화려하던 단풍나무들도 이제 낙엽이 지고 앙상한 나신으로 겨울채비를 하는 이때, 우리는 그간 무엇을 배우며 살아왔고 또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겸허하게 성찰해 봅시다.

‘학습’이란 머리로 배우는 ‘학’(學)과 몸으로 익히는 ‘습’(習)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 배우는 것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단지 내 머리에 주입하는 것이기에, 곧바로 내 몸에 습득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멋진 이야기를 들어도 며칠 지나면, 내 삶에서 쉽게 잊혀지곤 하지요. 그건 그 지식이 내 몸에 배어들어서 내 삶에서 나오는 지혜로 영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을 깊이 성찰하다 보면, ‘아는 것’(지식)보다 ‘살아내는 것’(지혜)이 더 값지고 절실하단 걸 느낄 적이 많지요.

조선조 오백 년을 지배했던 유교(주자학)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따지고 이치를 알아내는 머리 중심의 주지적 지식을 강조하며 가례(家禮)와 정통성 논쟁에 빠져서 일상인의 삶의 현실과는 괴리된 가치관을 뿌리 깊이 심어놓았습니다. 기실 유교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공동체를 중시하는 아름다운 미덕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농공상 중에서 오로지 ‘선비’들만, 그중에서도 ‘장원급제’한 이들만을 추켜세우던 기억의 문화가 있어 아직까지도 우리 교육의 병폐로 또렷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사법시험 최연소합격이라던 W검사의 몰락은 ‘공부 잘 하면 뭐하나’ ‘도대체 뭘 배웠기에 권력의 하수인으로밖에 못 사는가’라는 교육에 대한 불신과 탄식을 일으킵니다. 숙명여고 쌍둥이사건 역시 (헬조선에서 괴로워하는 청년들의 표현으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나라’에서 ‘인간됨을 배우지 못 한 교육모순’의 단면입니다.

오늘날 무한경쟁이 판치는 피로사회에서 불안과 과로가 일상화되다 보니, 대학은 점점 더 ‘취업준비 훈련소’로 전락하고 있지요. 진리에 목말라하고, 세상과 인생을 관조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내는 ‘지혜’를 배우기보다는, 취직을 위해서 ‘지식’을 암기하고 경쟁에서 남들을 이기고 살아남게 해주는 기술 습득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이 같은 현실은 안타깝게도 ‘고학력’ 사회를 계속 부추기고 있습니다.

기실 우리네 욕망은 저마다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주류문화’는 같은 욕망을 품도록 우리의 내면을 주조하기도 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불확실한 시대에 살다 보니, 돈벌이, 취직, 학력, 성공 등에 관한 ‘내적 갈증’(욕망)이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삶에 좀비처럼 따라붙으며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갈증은 ‘인정받고 싶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데 영적인 삶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인정받고 싶은지를 성찰하는 지혜’를 배우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인정받지 못 한 상처에 매달리며 성공이나 과시로 자기를 인정받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에 이끌려 노예처럼 살기 쉬운데, 그 욕망의 뿌리는 세상적 인정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영적 성찰은 세상적 집착에서 벗어나서 바로 하느님의 시선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나로서 모질고 힘겨운 인생을 이렇게 버텨 나가는 삶 한가운데,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조건 없이 나를 지지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며 가난한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지혜는 지복으로 향하는 참된 배움이지요.

학벌, 재력, 명예는 하느님 없이도 우리 힘만으로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마음의 습관을 우리가 배우고 익히게 된다면, 그간 인정받지 못해서 느꼈던 상처와 뿌리 깊은 열등감은 존재의 뿌리이신 그분 안에서 치유됩니다. 수도원에서 25년 동안 살아온 저도 그 배움이 늘 부족하고 힘든 적도 참 많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길이 제 삶을 비추실 적에는 ‘오늘 죽어도 아쉬움이 없습니다’라는 가슴에 사무친 기도가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그 배움의 길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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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일 신부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